친구를 생각하다 - 농다리에서 하늘다리까지 이어지는 초롱길에서
친구를 생각하다 - 농다리에서 하늘다리까지 이어지는 초롱길에서
  • 나무신문
  • 승인 2017.07.1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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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북 진천
▲ 농암정에서 본 초평저수지.

야영, 30여 년 전 어느 여름날
나는 30여 년 전 어느 여름 날 충북 진천군 미호천 농다리 옆 물가에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였다. 살갗을 태우는 햇빛과 지구를 삶는 것 같은 습도가 어우러지던 날이었다. 그런 날 우리는 야영을 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캠핑이 대세지만, 당시에는 캠핑이라는 말도 없었다. 그냥 한뎃잠이었다. 지금처럼 수 백 만원, 수 천 만원이 넘는 캠핑 장비는 일절 없었다. 우리는 각자 알아서 집에 있는 도구와 먹을 것을 가져오기로 했다.  

▲ 물 위로 새 한 마리 난다.

야영을 하기로 한 건 순전히 미호천에 있는 농다리 때문이었다. 1000년 전에 놓은 돌다리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친구들의 눈빛은 하나 같이 빛났었다. 

농다리에 도착한 우리들은 집에서 가져온 것들을 냇가에 펼쳐놓았다. 먹을 것은 라면뿐이었다. 누군가 가져온 고추장이 유일하고 훌륭한 반찬이었다. 소주 댓병을 가져온 친구는 현재 고위공무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물가에 간다는 말에 누군가는 낚싯대를 준비했고, 누구는 어항과 반도를 들고 왔다. 그리고 결정적인 물건 하나, 텐트를 짊어지고 온 친구도 있었다. 텐트라고 해야 지금처럼 으리으리하고 삐까번쩍한 게 아니고, 그저 이슬을 피할 만한 얇은 나일론 천막이었다. 나는 삼촌이 쓰던 코펠과 고체연료를 가져갔다. 

▲ 초평저수지가 고즈넉하다.

사전에 가져올 것들을 미리 정한 것도 아닌데, 각자 알아서 가져온 것들의 조합이 완벽했다. 

물가에 텐트를 치고 짐을 정리한 다음 우리는 물로 뛰어들었다. 낚싯대는 있는데 미끼가 없었다. 다행히 모형 파리가 낚시가방에 꽂혀 있었다. 어항은 있는데 물고기를 유인할 미끼가 없었다. 어항에 고추장을 발랐다. 반도를 들고 텀벙거리며 냇물 위아래로 뛰어다녔다. 십중팔구는 물풀과 돌멩이가 전부였지만 간혹 피라미도 잡혔다. 

▲ 미호천과 인공폭포.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간대에 시냇물에서 물비린내가 갑자기 진해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저녁을 준비했다. 먹을 것은 라면밖에 없었지만 그것도 좋았다. 피라미를 넣고 라면을 끓였다. 히히덕거리며 라면을 먹는 동안 저녁이 깊어갔다. 모닥불을 피웠다. 

불빛과 어둠의 경계가 신비했다. 어둠 저편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닥불 둘레에서 떠도는 우리들의 말소리가 어둠의 경계를 넘어온 시냇물 소리와 섞여 감은 하늘 총총한 ‘별밭’으로 흐른다. 

▲ 미호천에 놓인 농다리.

열여덟 우리들에게 벅찬 밤이었다. 누구는 이야기를 했고 누구는 그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따위의 세속적인 이야기가 범접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우리들이 이야기 하는 동안 별들은 제 빛을 감은 타래를 풀어 지상의 한 귀퉁이 시냇물 옆에 앉아있는 우리들 가슴에 그 빛을 엮었다.   
 

▲ 농다리를 건넌다.

1000년 전 돌다리를 건너다
30여 년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 혼자였다. 농다리로 가는 길, 초입에 농다리 전시관이 있다. 농다리 전시관 앞 뜰에 농다리유래비가 있다. 비석에 1932년 발간된 상산지(진천군의 향토사를 기록한 책)에 실린 농다리에 대한 내용을 새겼다. 

내용에 따르면 농다리는 세금천과 가리천이 합류하는 굴티 앞에 놓였다. 붉은 돌로 음양을 배합하여 28칸으로 지었다. 그중 4칸이 매몰되어 24칸이 남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농다리가 있는 곳은 미호천과 백곡천이 만나는 곳에서 약 1.5㎞ 정도 떨어진 하류다. 미호천이 농다리를 지나 약 2.2㎞ 정도 흐르다 초평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초평천을 맞이하여 함께 흐른다. 그 물길이 금강과 하나가 되어 흐르다 바다가 된다.

▲ 초평저수지로 가는 길에 뒤돌아본 풍경에 농다리가 있다.

비 그친 날 미호천은 흙빛 물로 가득했다. 넘실대며 흐르는 기세가 농다리를 삼킬 것 같다. 천 년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농다리는 큰 비에 잠긴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물난리에도 지금까지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다리를 만든 사람들의 지혜와 다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 덕이다. 

농다리부터 하늘다리까지 약 1.4㎞ 정도 되는 길에 ‘초롱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농다리 초입에 있는 농다리전시관부터 따지면 1.8㎞ 정도 된다. 

농다리를 건너서 오른쪽으로 가면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올라 농다리를 본다. 보는 위치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 농다리전시관.
▲ 농암정.

이정표에 있는 하늘다리 방향으로 올라간다. 고개마루를 넘는다. 용고개(살고개)다. 초평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된 마을이 있었다. 옛날에 그 마을 주변 산세가 용의 형상을 닮았다는 얘기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앞에 있는 산을 깎아 길을 낸 뒤에 마을은 점점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산에 길을 낸 그곳이 풍수지리상 용의 허리에 해당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용고개다. 용의 기운이 죽었다고 해서 살고개라고도 부른다.

▲ 용고개 성황당.
▲ 용고개 성황당 앞에 소원이 적힌 리본이 매달려 있다.

고개를 넘으면 초평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저수지 둘레에 데크길을 만들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하늘다리가 나온다. 하늘다리를 건너면 매점이 있다. 매점에서 냉커피를 사서 파라솔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았다. 날은 더웠지만 물 위를 지나온 바람을 맞으면 선선했다. 

하늘다리 오른쪽 절벽에 있는 바위가 논선암이다. 두타산의 세 신선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논선암에 내려온 세 신선은 주변 지형의 이름에 ‘배’와 관련된 것이 있다는 얘기를 나누며, 훗날 이곳에 배가 뜰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초평저수지가 생겨 배가 뜨고 있다. 

농암정에 올라
왔던 길을 되짚어 걷는다. 돌아가는 길 풍경이 올 때와는 또 달랐다. 초평저수지 물 위 공중에서 나비 두 마리가 놀며 난다. 물 가 고사목이 솟대 같다. 습기 머금은 공기가 파란 하늘에 미세한 증기의 막을 만들고 있었지만 그 풍경도 그윽했다. 데크 바닥에 떨어진 가을빛 마른 잎은 짙은 초록의 여름에 이질적이다. 감동(感動), 마음의 움직임은 사소한 이질부터 시작된다. 한여름에 낙엽 밟는 소리를 듣는다. 

▲ 왔던 길로 돌아간다.

데크길이 끝나고 용고개로 가는 길에, ‘농암정 200m’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농암정으로 올라갔다. 

정자 난간을 따라 한 바퀴 돌며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초평저수지와 주변 산들이 어울린 풍경, 농다리가 있는 미호천 풍경,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정자는 바람이 부는 언덕 꼭대기에 있다. 배낭을 벗고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이했다. 햇볕 받아 달아오른 몸의 열기가 식고 땀이 마른다. 물 한 모금이 달다. 정자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눈에 박힌다. 

▲ 물가에 놓인 데크길.
▲ 물가 고사목이 솟대 같다.

농암정에서 내려가 농다리를 건너 주차장에 있는 간이식당에 들렀다. 초롱길을 걷기 전에 인공폭포와 미호천의 통쾌한 소리를 들으며 라면을 먹었던 그 집이었다. 

유명한 덕산막걸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부추고추전에 시원한 막걸리 한 모금 하며 삼십 여 년 전 친구들과 야영을 했던 냇가 그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농다리가 있는 냇가 풍경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친구들에게 전송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 핸드폰 문자메시지가 왔다. ‘고맙다 친구야’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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