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앞 너럭바위, 마을 앞 개울
정자 앞 너럭바위, 마을 앞 개울
  • 나무신문
  • 승인 2017.06.09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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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경남 함양 화림동계곡

경남 함양군 선비문화탐방로 1코스 봉전마을에서 농월정까지

▲ 계곡을 건너는 낮은 다리가 보인다. 시골 버스가 개울 옆 도로를 천천이 달린다.

화림동계곡을 따라 약 6㎞ 정도 구간을 걷는다. 그곳에는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 지은 정자가 7개 있고, 여행지가 아닌 평범한 시골마을이 있다. 정자 앞 너럭바위 위로 물이 흐르고 시골 마을 앞 개울에는 벌써부터 천렵이다. 

거연정, 군자정, 영귀정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버스공용터미널에 도착했다. 점심 먹을 때는 안 됐지만 터미널 주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안의는 소고기 요리로 유명하다. 그중 갈비찜과 갈비탕이 인기다. 

마당이 있는 식당에서 갈비탕을 시켰다. 마당에 고이는 햇볕을 바라보며 밥을 먹었다. 어린 시절 햇볕 쨍쨍한 여름 어느 날 마루에 앉아 찬물에 밥을 말아 먹던 생각이 났다. 그때 주인집 마당에는 해바라기가 피었었다. 마음 속 구석에 있는 추억의 방 자물쇠를 ‘마당이 있는 식당’이 열어줬다. 

터미널 한 쪽에 시골 마을 곳곳을 지나며 사람들을 내려주고 태워주는 군내버스를 타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봉전마을에서 내렸다. 이번 여행의 출발지점인 거연정이 봉전마을에 있다.

봉전마을 옛 봉전초등학교에 비석이 보인다. ‘생원 세량공 효자비’다.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효자와 열녀 등 충(忠), 효(孝), 열(烈) 3강의 윤리가 내려온다는 내용의 안내문구가 보인다. 그래서 이 마을을 삼강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옛 봉전초등학교에서 내려와 도로를 건너 거연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거연정은 화림재 전시서 선생이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을 기리기 위해 그의 7대 손인 전재학 전계진 등이 1872년에 세운 정자다. 

▲ 거연정을 지난 계곡물이 군자정 앞으로 흘러간다. 사진 왼쪽 나무 안에 군자정이 있다.

시퍼런 물이 고였다 흐르는 기암괴석 암반바위 위에 정자를 지었다. ‘거연’은 평안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계곡 숲 아래 물이 흐르고 너럭바위가 펼쳐진 그 풍경에 있으니 아무 일 없다는 소식을 누구에게라도 알리고 싶었다. 

정자 옆 바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다가, 바위 골에서 부서져 흐르는 물줄기에 손도 적셔보다가, 너울대는 나비를 쫓기도 했다.  

거연정 옆에는 군자정이 있다. 군자정은 화림재 전시서 선생의 5대 손인 전세걸 전세택 등이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1802년에 지은 정자다. 

정여창 선생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세종 때 태어나 성종 때 뜻을 펼치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조선 전기에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와 신진세력인 사림파 사이에 일어난 정치적 대립 사건. 훈구파가 사림파에게 화를 입혔던 사건이다.)때 유배형을 받게 된다. 중종 때에 우의정에 증직(죽은 뒤에 품계와 벼슬을 추증하던 일) 되었다. 

정여창 선생이 안음현(지금의 안의면 일원)의 현감으로 있을 때 백성들의 고충이 과도한 세금에 있다고 판단하고 ‘편의수십조’라는 일종의 규칙을 만들어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기도 했다.   

군자정 옆에 있는 봉전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해서 데크길을 걷다보면 영귀정이 나온다. 영귀정을 지나면 동호정이다. 

▲ 동호정

동호정과 호성마을 
동호정으로 가는 길에 농부들이 땀으로 일군 밭을 지난다. 개울 건너편에 동호정이 보인다.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9대 손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에 세운 정자다. 정자 앞에 너럭바위가 펼쳐졌다. 냇물이 너럭바위를 돌아 흐른다. 

동호정을 지나면 호성마을이다. 마을 입구 냇가 풀밭에 염소 한 마리가 풀을 뜯는다. 개울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허리를 굽혀 물 안을 들어다 보며 올갱이를 잡는다. 뜨거운 햇살이 아주머니 등에서 부서진다. 아주머니는 저녁 밥상에 올갱이국을 올릴 생각인가 보다. 아욱과 올갱이를 넣고 된장을 풀어 끓인 올갱이국 생각에 또 다시 추억의 방문이 열린다. 

▲ 호성마을 앞 개울가 풍경

삶은 올갱이 알맹이를 바늘로 빼는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알맹이를 모아서 국도 끓이고 무쳐먹기도 했다. 올갱이국에는 개울의 물비린내와 흙냄새, 미루나무를 스치고 온 바람 냄새, 뚝방길 소똥냄새까지 다 담겼었다. 호성마을 올갱이국은 호성마을의 냄새가 날 것이다. 

호성마을 앞을 지나가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 두 명과 아버지로 보이는 어른 한 명이 마을 앞 개울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 하러 가냐고 물으니 물고기 잡으러 간단다. 어떤 곳은 물이 아이들 허리 정도까지 차는 곳도 있었다. 아버지와 아이들이 고기를 잡는 개울 한 쪽에 키 큰 미루나무가 오후 두 시의 땡볕처럼 꽂혀 있었다. 
 

▲ 화림동계곡 가에 지어진 농월정

경모정, 람천정, 황암사, 농월정
호성마을을 지나면 경모정이 나온다. 경모정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문을 연 무열공 배현경 선생의 후손인 계은 배상매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며 쉬던 곳에 그의 후손들이 1978년에 세운 정자다.  

경모정 앞에도 너럭바위와 크고 작은 바위가 놓였다. 너럭바위에 파인 골로 물이 부서지며 흐른다. 

경모정 다음에는 람천정이 나온다. 람천정 앞에도 너럭바위가 있다. 너럭바위로 흐르는 물을 건너는 낮은 다리가 정겹다. 그 다리를 건너 둑방길로 걷는다. 멀리 산에 한옥 건물 몇 채가 보인다. 황암사다. 

▲ 황암사

황암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황석산성전투, 왜적은 2만7000명이었다. 함양 산청 합천 거창 초계 삼가 안의에 사는 주민들까지 나서서 왜적과 싸웠지만 음력 8월18일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1714년에 황석산 아래에 사당을 짓고 황암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때부터 황석산성 전투에서 순국한 사람들의 뜻을 기렸었는데, 그 일이 중단 된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다. 일제는 사당을 헐고 추모행사를 금지했다. 

황암사에서 나와 다리를 건넌다. 차가 다니는 도로가 갈라지는 곳에서 왼쪽 길로 간다. 옛날 도로다. 옛날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도로 왼쪽에 농월정으로 가는 오솔길 입구가 보인다. 

▲ 화림동계곡과 농월정

농월정은 조선시대 선조 때 예조 참판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정계에서 물러난 후 1637년에 지은 정자다. 2003년에 불에 전소됐는데 복원했다. 

농월정 주변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산을 이룬 수직 절벽이 계곡으로 이어져 수평의 너럭바위가 되고 암반바위가 된다. 크고 작은 바위가 곳곳에 놓였고, 오랜 세월 깎이고 다듬어진 바위의 골과 홈 사이로 물이 고이고 흐른다. 

▲ 계곡 바위에 화림동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계곡 한 쪽 바위에 화림동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글자에는 당시에 이곳을 찾은 선비들의 이야기를 담았겠지만, 그것을 보는 지금 사람들은 그저 아무 근심 없이 보낸 화림동계곡의 하루를 마음에 담을 뿐이다. 

▲ 나무가 있는 개울 풍경
▲ 흐르는 계곡물을 따라 걷는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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