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호기심과 열정의 사나이 시볼트
지적 호기심과 열정의 사나이 시볼트
  • 김오윤 기자
  • 승인 2017.06.0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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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권주혁(국제 정치학 박사) 남태평양 연구소장, 전북대학교 외래교수
▲ 나가사키의 시볼트 기념관.
▲ 권주혁(국제 정치학 박사)남태평양 연구소장, 전북대학교 외래교수

[나무신문 | 권주혁(국제 정치학 박사) 남태평양 연구소장, 전북대학교 외래교수] 우리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고, 우리나라 산림에서 가장 많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수종인 소나무를 모르는 우리 국민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부르는 애국가에도 나오니 말이다.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조상들이 그린 그림(산수화)에도 약방에 감초격으로 배경에 자주 그려져 온 것이 소나무이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며 명절에 먹는 송편의 표면은 향긋한 소나무 잎으로 감싸기도 한다. 일제 강점시대에는 연합국을 상대로 한 전쟁을 수행할 기름이 부족하자 일본 정부는 우리 국민에게 산에 가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모아오는 일을 시켰다. 소나무의 송진에서 전쟁수행에 필요한 기름을 추출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우리 생활에 필요하고 (일제 시대의 나쁜 기억도 있지만) 우리 피부에 와 닿는 친근한 소나무이지만 이 소나무의 학명(學名)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은 아마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과학적 학문에 근거하여 이 소나무의 학명을 지은 사람은 누구일까 궁금해 하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일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소나무의 학명은 Pinaceae(科) Pinus(屬) densiflora(種)로서 과학적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일본에서 이 학명을 190여년 전에 지은 사람은 한국인 학자도, 일본인 학자도 아닌 네덜란드 육군 포병대 군의관인 시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의학박사이다. 우리나라 소나무와 같은 소나무가 일본 열도에도 자라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이를 아카마쓰(赤松)라고 부른다. 

▲ 19세기, 나가사키 항구와 데지마(중앙의 부채꼴 인공섬).

시볼트는 1796년 2월 17일, 오늘날 독일 연방공화국 바이에른주(州)의 뷜츠부르크(Würzburg)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를 비롯하여 많은 대학교수를 배출한 의학계의 명문이었다. 시볼트는 뷜츠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외과, 산부인과, 내과를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인근 마을에서 개업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소 가지고 있던 지적(知的) 호기심과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그때까지 조사되지 않았던 지역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네덜란드 육군 포병대 군의관(소령)이 되어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이던 동인도(東印度: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근무 발령을 받아 1822년 9월에 네덜란드를 출발하였다. 당시 동양무역의 중심지이던 바타비아(Batavia: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 도착한 시볼트를 만난 네덜란드인 동인도 총독은 시볼트가 자연과학에 대해 깊은 지식과 탐구심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파견하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1641년에 히라도에서 무역관을 나가사키의 인공섬인 데지마(出島)로 옮기고 네덜란드인들을 파견하여 일본과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시볼트는 데지마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들의 건강관리를 담당하는 임무를 받아 1823년 6월 28일 바타비아를 떠나 8월 11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시볼트는 데지마에서 일본인 통역사들과 교류를 통해 일본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그는 의학뿐만 아니라, 일본의 자연과학(식물학, 동물학), 지리학, 언어학, 민족학,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열정을 갖고 공부하였다. 

▲ 만년의 시볼트 박사.

그는 길이 230m, 폭 70m 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면적의 데지마에  길이 80m, 폭 20m의 식물원을 만들어 진기하거나 전형적인 일본의 수목을 수집하여 심어놓고 나름대로 식물학 연구를 하였다. 오늘날 데지마에는 과거 시볼트가 만들어 놓은 식물원 자리에 시볼트를 기념하여 나가사키시에서 ‘시볼트 귀향(歸鄕) 식물원’을 다시 만들어 놓았다. 1990년 11월, 현지를 방문한 네덜란드의 알렉산더(Willem Alexander)왕(당시는 황태자)은 방문 기념으로 이 식물원안에 네덜란드 수목 한그루를 식재하였다. 

시볼트 당시, 나가사키에는 의학을 비롯한 서양의 발전된 학문을 배우기 위해 많은 일본인 의사들이 모였으므로 시볼트는 이들에게 의학과 식물학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그는 일본에 대한 조사 및 연구에 몰두함과 동시에 일본인 의사들에게 의학 강의를 하기 위해 1824년에 나가사키 교외의 민가를 구입하였고 이곳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의술과 학문을 배워 일본 전국으로 전파하였다. 시볼트의 문하생들은 일본의 역사와 산업, 동식물 등에 관한 수많은 과제를 부여받고 네덜란드어로 정리한 논문을 제출하였다. 또한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각지의 동식물을 수집하여 시볼트에게 보냈다. 시볼트는 이에 대해 서양 의학습득 증명서와 의료 기구, 학술서를 주어 그들의 노고에 보답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은 자료를 기초로 하여 시볼트는 일본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계속하였다. 

원래 수국(水菊: Hydrangeaceae科 Hydrangea屬에는 70여개의 種이 있음)을 좋아하던 시볼트는 나가사키에서 진한 하늘색 꽃을 가진 수국의 다른 종을 발견하고 기뻐서 이 꽃에 사랑하는 일본인 아내 구스모도 다키(楠本瀧)의 이름을 따라 종명(種名)을 otaksa 라고 지었다. 그는 가끔 아내를 ‘오다키상’이라고 높여 불렀던 것이다. 오늘날 수국(일본에서는 ‘아지사이’라고 부름)은 나가사키시의 꽃(市花)으로서 나가사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풍랑을 만나 나가사키에 도착한 조선인 상인, 어부 그리고 무역을 하려고 일본에 온 조선인을 만나거나 조선과 무역을 하는 일본인들을 만나 조선에 대한 공부도 상당히 폭넓고 깊게 하였다. 그는 한글 공부를 하여 조선어 사전도 만들고 조선의 지리, 동물학, 식물학, 사회 구조, 군사제도, 조선민족과 고대사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조사하였다. 

시볼트가 열정적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연구와 조사를 하는 모습을 본 일본 관리들은 시볼트의 순수한 호기심과 학습 의지를 일본을 정탐하는 간첩 행위로 오해하여 1829년 12월, 국외추방을 하였다. 이에 시볼트는 일본인 아내 다키와 두 살 된 딸 이네와 헤어져 강제 추방되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귀국후 시볼트는 네덜란드 정부와 학회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한편, 그는 일본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데 몰두하였고 일본에서 수집한 수많은 자료를 정리하여 그 성과(논문)를 유럽에 계속 소개하였다. 또한 박물관을 개설해 수집한 자료를 공개하자, 시볼트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져 네덜란드 정부에서 작위를 받고 유럽 각국에서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자신의 생애를 일본 연구에 바친 시볼트는 수많은 저서를 발표하였는바 그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일본’, ‘일본 식물지’, ‘일본 동물지’로서 그 학술적인 가치는 오늘날에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 

1832년,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시에서 발간한 ‘일본’은 일본에 대한 시볼트의 종합적 연구서인데 이 안에 우리나라에 대한 별도의 장(章)이 들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장을 1987년에 박영사(博英社)에서 ‘시볼트의 조선견문기(朝鮮見聞記)’라는 제목으로 발간하였다.

1848년, 네덜란드 육군은 그를 대령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1858년, 일본정부로부터 29년만에 국외추방 해제 통보를 받은 시볼트는 그 다음해에 63세의 나이로 30년만에 다시 일본을 찾았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시볼트는 일본인 아내 다키와 딸 이네, 그리고 옛 문하생들과 재회하고 옛정을 나누었다. 헤어질 때 두 살이었던 이네는 시볼트의 문하생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일본 최초의 서양의학 여성 의사(산부인과)가 되어있었다. 그후 이네는 메이지 천황의 황후 주치의사로서 평생을 보냈다. 그녀의 외동 딸 다카 역시 의사가 되었다. 1977년, 한국과 일본에서 TV 상영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일본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 나오는 금발의 여자 주인공 메텔의 성격은 원작 만화가 마쓰모도 레이지(松本零士)가 시볼트의 외손녀인 다카를 모델로 하였다.

▲ 은하철도 999 전시회(서울, 예술의 전당).

일본 정부는 외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시볼트의 기념관을 나가사키 시내에 건립하였으며(시볼트가 일본인 문하생들을 가르치던 곳)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그의 공적을 실었다. 유럽의 경우,  시볼트가 오래 거주하였던 네덜란드 라이덴시에는 시볼트가 수집한 자료를 전시하는 박물관 세 곳, 독일의 시볼트 고향에는 시볼트 박물관, 그리고 런던 대영박물관, 상페테르부르그 박물관, 뮌헨 민속학 박물관에는 시볼트에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는 특별실이 있다. 

국민대학교의 고(故) 엄영근 교수가 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고 사후 정연집 교수 등 후배교수들에 의해 2015년에 발간된 ‘한국 목재의 해부학적 구조(Wood Anatomy of Korean Species)’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목재 266종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시볼트가 독일 식물학자 주카리니(Joseph Gerhard Zuccarini)와 함께 연구하여 공동으로 학명을 붙인 수종이 35종, 시볼트 단독으로 학명 붙인 것이 1종, 그리고 시볼트의 이름이 학명의 종(種)으로 된 것이 2종 들어있다. 필자는 국민대학교 정연집 교수와 우드테크의 이갑식 사장을 통해 전해 받은 이 책을 2016년 12월에 나가사키의 시볼트 기념관을 방문시 기념관에 기증하였다. 

필자는 임학자도 아닌 서양인이 190여 년 전에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소나무를 비롯한 많은 수종을 연구하여 학명을 붙인 것에 대해 크게 놀랐고 시볼트의 과학적 호기심과 뜨거운 열정, 철저한 시간관리에 큰 감명을 받았다. 생전 만난 적도 이야기한 적도 없으나 국적을 떠나서 그가 대(大)학자, 군인, 의사로서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고 분투노력하는 자세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하는 바이다.  

두 번째 일본방문에서 수집한 자료를 뮌헨의 연구실에서 정리 하던 중 갑자기 바닥에 쓰러진 시볼트는 “나는 아름다운 평화의 나라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1866년 10월 18일, 70세를 일기로, 마치 소설 같은 삶을 살다가 학자답게 조용히 연구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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