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켜라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켜라
  • 나무신문
  • 승인 2017.05.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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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시 금천구

#여행 #장태동 #호암산 #호압사

▲ 호압사 뒷산에서 본 호암산 줄기와 호압사

호암산과 호압사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새 왕조를 연 조선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할 무렵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반은 호랑이 모습이고 반은 이상한 동물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나타나서 한양의 궁궐을 부수는 꿈을 꾼다. 꿈에서 이성계는 도인에게 그 괴물을 물리치고 궁궐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물었고 도인은 호랑이 꼬리를 제압하라는 말을 건넸다. 

▲ 호압사 마당에 핀 작은 꽃들.

이성계 옆에는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무학대사가 있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에게 꿈 이야기를 듣고 한양을 향하고 있는 산줄기를 돌아다니며 지세를 살폈다. 그리고 호암산에 절을 지을 것을 건의했고 이성계는 이를 받아들였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2동 호암산 산줄기에 있는 호압사는 이렇게 해서 건립되게 된다. 

관악산에서 이어지는 지맥이 삼성산을 거쳐 호암산에 닿게 된다. 호암산은 북쪽을 향해 달리는 호랑이의 형국이었다. 그 북쪽에 조선의 수도 한양이 있었던 것이다. 

▲ 호압사 뒷산에서 본 불영암.

호압사의 창건 설화는 하나 더 있다. 조선시대 3대 왕 태종 이방원이 ‘호압(虎壓)’이라는 편액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의 도성인 한양을 향해 달려가는 호랑이 형국인 호암산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절을 짓고 호압(虎壓)이란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는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함께 내려온다.  

실제로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으로 이어지는 산에 사는 호랑이에 의한 피해가 심해서 호랑이를 누른다는 의미로 호압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호암산과 호압사에 얽힌 조선시대 초기의 이야기에는 나라의 문을 연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 호압사 일주문

한양을 불기운으로부터 지켜라
호압사에는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두 그루 있다. 절을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은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 정면에는 약사전이 있다. 약사전 안에는 세 개의 부처상이 있다. 그 중 가운데 것이 문화재로 지정된 약사불이다. 약사불은 중생을 온갖 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부처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절이 작아 경내를 돌아보는 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절에서 절 뒷산으로 올라가는 산길로 접어든다. 

▲ 호압사 풍경과 호압사 뒷산 꼭대기 바위봉우리.

가파른 길을 오르다보면 ‘한우물’로 가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에서 ‘한우물’로 가지 않고 이정표 부근에 있는 바위를 타고 올라가면 시야가 트이는 곳이 나온다. 넓은 터 바닥이 대부분 바위다. 기암괴석이 마당처럼 펼쳐져 있다. 바위절벽 한 쪽 끝에서 아래를 보면 호암산의 산줄기와 그 산에 자리잡은 호압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호암산 전체의 형국을 볼 수 없어 산이 ‘한양을 향해 달려가는 호랑이의 형국’인지 모르겠지만 호압사가 자리잡은 자리는 예사 자리가 아닌 느낌이다. 올라왔던 바윗길로 내려가 ‘한우물’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 앞에 선다. ‘한우물’ 방향으로 간다. 

한우물에 도착하기 약 50m 전에 석구상이 나온다. 호압사에서 서쪽으로 약 1㎞ 정도 거리다. 

▲ 석구상

석구상을 처음 발견했을 때 사람들은 해태상으로 알았다. 조선시대 한양도성을 건설할 당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 줄기인 호암산에 동물의 상을 만들어 경복궁 광화문 앞 해태상과 마주보게 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실제로 현재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방향이 광화문 방향이기도 하다. 

석구상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 불영암과 한우물이라는 연못이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호암산성 발굴조사 때 연못 2개와 건물 터 4개가 확인 됐다. 그중 한 연못이 조선시대 것이었다. 연못을 발굴·조사할 때 ‘石拘池(석구지)’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 됐다.(문화재청 자료에는 ‘石拘池’라고 표기 됐는데, ‘石狗池’의 오기인 것 같다. ‘拘’는 ‘잡다’ ‘잡히다’ ‘체포하다’ 등의 뜻이고, ‘狗’는 ‘개’ ‘강아지’ 라는 뜻이다.) 

그래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수상)을 돌로 만든 개의 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석구상이다.  

조선시대 한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다. 한우물은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호암산성에 주둔한 선거이 장군 부대가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 부대와 작전을 펼쳐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양의 화재를 막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조선 건국과 관련된 전설도 내려온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연못 이외에 신라시대 때 연못도 발견 됐다.    

▲ 한우물과 불영암.

시흥, 1000년 역사
불영암 마당에 있는 이정표 ‘시흥동(호암1터널)’ 방향으로 간다. 산을 내려가다가 시흥5동 방향 이정표를 따르면 범일운수 종점 부근으로 길이 연결된다. 

범일운수 종점에서 서쪽으로 약 300m 거리에 ‘시흥동은행나무’라고 알려진 88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 그루는 도로 가운데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조금 떨어진 인도에 있다.

▲ 시흥동은행나무 두 그루.

도로 가운데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는 조선시대 시흥 현령을 지낸 사람들의 선정비가 있다. 인도에 있는 은행나무 앞에는 조선시대 동헌관아 터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는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묻힌 능을 찾아갈 때 행궁으로도 사용했다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 고려시대 6대 임금 성종(991년)이 고을의 별호를 시흥(始興)으로 했다.’는 내용이 금천구 시흥5동주민센터 자료에 나온다.  

자료에는 또 ‘시흥’은 지금의 금천·구로·영등포·동작·관악구와 광명시 안양시를 관할하던 관아(官衙)가 있던 곳이라는 내용도 적혀 있다.  

‘시흥동은행나무’ 옆에 은행나무시장 입구가 보인다. 골목을 따라 장이 형성 된 곳이다. 골목에 시장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냥 ‘골목시장’으로 불렀다. ‘골목시장’이 ‘은행나무시장’이 된 지 몇 년 안 됐다고 시장에서 반찬을 파는 아줌마가 일러준다. 

시장은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생선가게, 채소가게, 반찬가게, 과일가게, 두부가게 등이 줄지어 있는 시장 골목을 구경하며 도착한 곳은 시장 골목 끝에 있는 식당이었다. 배도 고팠고 목도 말랐다. 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오늘 걸었던 숲길, 산길을 되돌아 봤다. 

풍수지리로 도읍지를 비호하려 했던 사람들의 간절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시장 골목에 어둠이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880년 은행나무 아래에 있는 조선시대 선정비가 을씨년스러웠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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