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에 빛나는 시간들
봄 햇살에 빛나는 시간들
  • 나무신문
  • 승인 2017.05.0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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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 개나리가 피어난 읍내리 마을 길.

[나무신문] #여행 #장태동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향교 #교동읍성

봄도 깊어지니 그 속을 모르겠다. 하늘은 여름 같이 더운 날도 만들고, 여름 같은 비를 내리다가도 하룻밤 사이 꽃샘바람 부는 첫 봄 같은 날도 지어낸다. 

이러구러 날은 지나 낼모레면 곡우다. 곡우에 비가 오면 그 해는 풍년이라는데, 일기예보에는 빗방울이 좀 떨어진다고 하니 풍년을 기대해도 좋겠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었던 세상, 희망으로 희망을 이야기하던 세월이 있었다. 이리 뜯기고 저리 빼앗기던 일들에 풍년에도 근심은 여전했던 그해 봄도 오늘과 같았겠지! 꽃 피는 봄날 반짝이는 세상이 서글프다.    

▲ 개나리와 마른 넝쿨.

교동향교에서 떠오른 글귀 
강화에 지인이 터를 잡은 뒤로 두어 달에 한 번은 강화를 찾게 된다. 겨울 끝에 한 번, 봄의 가운데에 한 번, 강화의 봄은 차분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강화를 찾은 첫날은 술잔을 나누며 밤 깊이 노닐었다. 강화풍물시장에서 산 주꾸미, 미나리, 쑥갓, 배추, 버섯, 그리고 소고기를 끓는 육수에 데쳐 먹었다. 강화 막걸리와 준비해 간 소주가 흥을 돋웠다. 

햇살에 눈을 뜨는 아침은 상쾌하다. 어젯밤 흥이 마음에 남아 가시질 않는다. 몸에는 숙취가 남고 마음에는 흥이 남았다. 숙취가 흥을 넘으면 술병이고 흥이 숙취를 넘으면 주선(酒仙)이다. 

하늘이 파랗게 열리고 햇살이 가득한 강화의 둘째 날이었다. 일행과 함께 교동향교를 찾았다.     
고려 충렬왕12년(1286년)에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오는 길에 공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하지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마을 사람들은 교동향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라고 믿고 있다. 

원래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조선시대 영조17년(1741년)에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남쪽 기슭으로 옮겼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다. 

▲ 교동향교.

향교에는 글이 새겨진 작은 바위가 있다. 그 바위를 노룡암이라고 한다. 순조20년(1820년)에 통어사 이규서가 ‘호거암장군쇄풍(호거암 장군이 풍기를 깨끗이 하였다.)’라는 7자를 새겼다. 원래는 교동현 동헌 북쪽 뜰 계단 아래에 있었는데 1987년에 교동향교에 옮겨 놓았다. 

향교를 한 바퀴 돌아보고 명륜당으로 돌아왔다. 가훈을 써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원래 가훈이 없지만, 순간 글귀 하나가 생각났다. ‘구르는 돌멩이처럼’.

▲ 교동향교. 가훈 써주기.

글을 써주시는 분이 글귀를 들으시더니 “듣기에는 평범하지만 속이 있는 글이네요”하신다. “그냥 순간 생각난 글입니다.”라고 했더니 그 옆에 있는 다른 분이 “돌은 물이 있어야 구르는 것인데…”라시기에 “제가 노력은 합니다만…”이라고 답했다. 

향교 마당에 고인 햇살, 향교 마당 위로 불어가는 바람, 파란 하늘, 먼 데 바다냄새 흙냄새…그런 것들에 둘러싸인 향교 명륜당 대청에서 묵향 맡으며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 교동향교에서 본 풍경. 정면의 나무가 읍내리 보호수다.

교동읍성과 돌담
향교에서 보이는 마을에 교동읍성이 있다. 교동읍성은 조선시대 인조7년(1629년)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돌로 쌓은 읍성이다.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세 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다. 

동문은 통삼루, 남문을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고 했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문만 남았다. 

▲ 교동읍성. 돌담 안에 햇살이 가득 고인다.

문루 없는 교동읍성 홍예문 옆으로 돌담이 이어진다. 돌담 안에 지붕 낮은 낡은 집들이 있다.  

지붕 위, 텃밭, 돌담 골목에 골고루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인다. 주인 떠난 빈집에 부서진 가재도구가 널브러졌다. 무너진 담장과 벽에 겨우내 마른 넝쿨이 뒤엉켰다. 그 뒤로 샛노랗게 피어난 개나리꽃이 아른거린다. 울타리가 개나리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개나리 울타리 옆에 슬레이트 지붕 얹은 낡은 집이 보인다. 골목은 그런 집과 집을 잇고 있었다.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골목에 있을지, 차로 돌아가 쉬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잠깐 동안 일행을 생각한 뒤 다시 골목길로 나섰다. 

▲ 부근당. 당나무

부근당과 느티나무
교동읍성 마을에는 예로부터 마을과 함께하고 있는 부근당과 느티나무가 있다. 부근당은 연산군과 연관이 있다고 전해지는 장소이며 그 옆 느티나무는 350살이 넘는 보호수다. 

중종반정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긴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됐다. 그리고 연산군은 교동에서 죽었다. 부근당에는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걸려있다. 

▲ 읍내리 빈 집

이 마을 주민들은 연산군과 그의 부인 신씨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부근당에서 당굿을 지냈다고 한다. 부근당 바로 옆에는 당나무가 있다. 

연산군은 교동의 봄을 보지 못했다. 1506년 9월에 교동현으로 유배 온 연산군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 읍내리 풍경.

당시 백성들은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 연산군에 대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충성이란 사모요 / 거동은 곧 교동일세 / 일 만 흥청 어디 두고 / 석양 하늘에 뉘를 좇아가는고 /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 /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겠네]

▲ 읍내리 햇살 좋은 곳에 벚꽃이 피어 반짝인다.

노랫말에 나오는 흥청이란 조선시대 연산군 때 각 지방에서 궁궐로 들어온 기녀들을 두고 한 말이다. 춤과 노래, 악기를 다루었던 기녀와 시중을 들었던 기녀 등이 있었다. 

궁에 들였던 1만 명의 흥청은 어디에 두고 노을 지는 교동 가시울타리 집에서 홀로 날을 새우는 것은 또 어떻겠냐고 노래했던 것이다.  

▲ 읍내리 느티나무. 350살이 넘었다. 보호수로 지정됐다.

부근당과 당나무가 있는 곳 옆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 350살이 넘은 느티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됐다. 부근당 앞에도, 느티나무 앞에도 햇살은 차분하게 땅에 내려 반짝인다. 공중에서 산란하는 햇살이 눈부시다. 

▲ 읍내리 느티나무 뿌리가 드러났다

향교에서 느티나무가 보이듯 부근당과 느티나무가 있는 곳에서 화개산에 둥지를 튼 향교가 보인다. ‘구르는 돌멩이처럼’ 언뜻 떠오른 글귀지만 생각할수록 괜찮다 싶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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