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고독의 시인 - 숭실대학교 교정과 은평구 수색동에 있는 김현승 시인의 흔적
가을과 고독의 시인 - 숭실대학교 교정과 은평구 수색동에 있는 김현승 시인의 흔적
  • 나무신문
  • 승인 2016.11.2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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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문학기행
▲ 김현승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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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김현승 시인이 떠오른다. 그는 시 ‘가을의 기도’에서 가을에는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 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은 자신의 영혼을 오롯이 마주하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절대고독을 마주한 그 앞에는 한 잔의 커피가 있었고 그는 시가 되었다. 

숭실대학교 교정에 있는 김현승 시비
김현승 시인을 생각하면 가을과 고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단편적인 예로 제목에 가을 또는 고독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그의 시가 30편 가까이 된다. 그의 대표작 ‘가을의 기도’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등은 가을이 사람들 앞에 있어야 하는 당연을 이야기 한다. 

시인은 ‘화르락’ 피어나는 단풍 보다는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가을의 기도’ 1연 3행) 오롯이 자신을 마주본다. 홀로 맞이하는 그 시간은 고독으로 이르는 길이 되고 시인은 그 지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을의 기도’ 3연 2행)를 기원한다.  

▲ 김현승 시비. 중앙도서관 옆 잔디밭에 있다.

숭실대학교 중앙도서관 옆 잔디밭에 김현승 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그의 시 ‘가을의 기도’가 새겨져 있다. 박두진 시인이 글씨를 썼다.

시비는 1984년 가을에 건립됐다. 원래는 그 이전에 시비를 만들려고 했는데 김현승 시인 10주기에 맞춰 시비를 세웠다. 

평양에서 태어나 전남 광주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낸 김현승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마치고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다형 김현승 연구>-보고사. 1996년 발행-에 수록된 연보에 따르면 김현승은 1934년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 두 편의 시를 당시 문과대 교수이자 시인이었던 양주동의 소개로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오게 된다. 위장병이 악화되어 광주로 내려와 있는 동안 교회의 작은 사건이 신사참배 문제로 확대되어 경찰에 검거 된다. 1심에서는 무죄, 2심에서는 80원의 벌금형을 받고 출옥했다. 

1938년 결혼한 뒤 평양 숭실전문학교로 돌아왔으나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었다. 김현승은 이때부터 학교 선생님, 금융조합 직원, 피복회사 직원 등을 하며 생계를 돌봤다. 시 쓰는 일은 잠시 접어야 했다.   
    

▲ 김현승 시인의 일터였던 숭실대학교 교정에 단풍이 물들었다.

커피와 서부영화
오래 전에 김현승 시인의 제자이자 시인인 권영진 교수를 만나 김현승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권영진 교수는 김현승 시인에 대한 기억 중에 가을과 커피에 대한 것이 많다고 했다. 커피를 좋아했던 시인은 원두를 사서 직접 갈아서 거름종이에 걸러 커피를 만들었다. 설탕과 프림을 넣은 커피도 즐겼다. 물을 끓여서 적당히 식힌 다음에 제일 먼저 커피를 넣는다. 다음에 프림을 넣어 진흙탕물 같은 색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설탕을 넣었다. 설탕은 커피 스푼으로 세 스푼 넣었다. 그리고 뜨거울 때부터 차가워질 때까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김현승 시인은 전남 광주에 살았던 유소년시절에 커피 향을 맡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서양의 선교사들이 그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선교사들이 올 때마다 커피를 끓였고 집안에는 커피 향이 가득했다.    

김현승은 서부영화도 좋아했다. 권영진 선생은 선과 악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세계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김현승 시인이 서부영화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 김현승 시인이 살던 집터.

은평구 수색동에 있는 시인의 집터
김현승 시인은 1960년 숭실대학교 부교수가 된다. <다형 김현승 연구>-보고사. 1996년 발행-에 실린 소재영 선생의 글에 따르면 김현승 시인은 전남 광주에서 1965년에 서대문구 수색동 119번지로 이사했다.  

2005년 민음사에서 발행한 <김현승 시전집> 연보에는 1975년 4월11일 김현승 시인은 자택인 서울시 서대문구 수색동 119-10에서 별세했다고 적혀있다. 

현재 수색동은 은평구 관할이 됐다. 관할 구가 바뀌었지만 번지는 변하지 않았다. 서대문구 수색동 119-10은 현재 은평구 수색동 119-10이 됐다. 은평구 수색동 119번지를 검색해보니 수색동 119-3으로 나온다. 두 주소는 현재 수색교회 제2교육관과 바로 옆 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김현승 시인이 전남 광주에서 이사를 한 집과 세상을 떠난 집이 다른 집인지 같은 집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가 서울에서 살았던 집은 없어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섰으니 현재 수색교회 옆에 그 터만 남아 있다. 

김현승 시인은 <김현승 시초> <옹호자의 노래> <견고한 고독> <절대고독> 등 네 권의 시집을 냈고 세상을 떠나기 전인 1974년에 <김현승시전집>을 관동출판사에서 냈다. 일제강점기 말에 몇 해를 제외하고 그는 시와 함께 했다. 

가을은 결실과 수렴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시비에 적힌 그의 시 ‘가을의 기도’에서 그는 낙엽이 떨어질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기원한다. 결실의 시기를 지나 땅으로 수렴된 것들이 겨울을 지나고 새 봄에 싹을 틔울 새 생명의 거름이 된다. 그는 그 가을에 고독을 보았다. 그의 시 ‘절대고독’에서처럼 고독과 마주한 시간 그는 시가 되었다.

▲ 김현승 시비. 중앙도서관 옆 잔디밭에 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내 언어의 날개들을/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내고 만다.//나는 내게서 끝나는/아름다운 영원을/내 주름 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우만지며/더 나갈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드디어 입을 다문다 - 나의 시와 함께.]-‘절대고독’ 전문. 2005년 민음사에서 발행한 김현승시전집에서 발췌-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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