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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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신문
  • 승인 2016.10.2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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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경북 영양 주실마을
▲ 호은종택. 조지훈이 태어난 집이다.

#여행 #장태동 #조지훈 #주실마을 #주실숲 #지훈문학관 #청록집 #월록서당

가는 날이 장날
경상북도 내륙의 몇몇 지방은 섬 아닌 섬이다. 영양군도 그렇다. 영양군으로 직접 가는 시외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하루 5회 밖에 없다. 동서울터미널이나 서울강남고속버스터미널 센트럴시티(옛 호남선)에서 안동 가는 버스를 타고 안동에서 영양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서울~안동 간 버스는 많다. 안동~영양 간 버스도 하루 20여 회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영양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목적지인 주실마을로 가는 군내버스 시간을 알아봤는데 약 1시간이 남았다. 시골 터미널 치고 사람이 많은 편이어서 물어봤더니 5일장이 서는 장날이었던 것이다. 

‘장구경에 콧바람 쐰다.’는 말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유모차를 밀고 가는 부부 등 장거리에는 남녀노소 사람들이 북적북적하다.  

장거리에서 식당을 찾았다. 장이 서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메밀묵밥을 먹었다. 높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 떠다니는 날씨와 메밀묵밥은 잘 어울렸다. 

장은 여전히 술렁거리고 있었다. 파는 사람 사는 사람의 흥정 소리, 한낮 따가운 햇볕에 얼굴을 찡그리며 ‘생선사려’를 외치는 덩치 좋은 사내의 목소리, 과자 좌판 옆에 앉아 맛보기 과자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의 목소리, 장터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어린 조지훈도 이 장터에서 저 아이들처럼 웃으며 놀았겠지!  

장구경에 1시간은 훌쩍 지났다. 장에서 터미널은 멀지 않지만 그래도 뛰었다. 버스는 사람들을 다 태운 뒤 시골길을 빠르게 달렸다.  
 

▲ 주실마을.

시인의 마을
목적지인 시인 조지훈이 태어난 주실마을은 영양 읍내에서 약 7~8㎞ 떨어졌다. 버스에서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은 나왔으나 엔진소리와 덜컹거리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옆에 앉은 할머니에게 주실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알려달라고 하니 당신을 따라 내리면 된다고 하신다. 

새하얀 머리를 짧게 잘라 곱게 빗어 내린 할머니의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할머니가 마을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마을 앞 숲에 머물렀다. 

▲ 주실숲.

주실마을 앞에는 마을숲이 있다. 100여 년 전에 마을 앞 자연적인 숲에서 이어지는 서북쪽 들판에 소나무를 심으면서 인공적으로 숲을 만든 것이다. 숲 이름이 주실숲이다. 숲 안에 조지훈 시인의 시비가 있어서 ‘시인의 숲’이라는 별칭도 있다. 

▲ 주실마을에서 본 주실숲.

주실숲에서 나와 마을로 들어간다. 마을 앞에 냇물이 흐른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마을로 들어갈 수 없다. 다리에서 주실숲이 한 눈에 보인다. 마을 앞은 논이다. 마을 뒤는 산이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었던 시절 농촌의 전형적인 풍경인 ‘배산임수 문전옥답’의 지형이 한 눈에 보인다. 

오후로 깊어가는 햇살이 그윽하게 마을에 고인다. 마을 가운데 있는 호은종택에서 조지훈은 태어났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1936년까지 살았다.

▲ 지훈문학관 입구.

시인 조지훈 
조지훈은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피터팬’ ‘파랑새’ ‘행복한 왕자’ 등을 좋아했다고 한다. 문학을 좋아했던 친형의 영향으로 조지훈도 문학의 꿈을 키우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1936년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게 된다. 

▲ 지훈문학관.

조지훈은 19세에 시인이 된다.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문단에 이름을 올린다. 당시 <문장>지를 통해 등단하려면 세 번 추천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첫 번째 시가 ‘고풍의상’이었다. <고대문화>에 실린 조지훈의 글에 따르면 강의시간에 낙서 삼아 쓴 것을 그대로 우체통에 넣었는데 뽑혔다. 그 다음에 낼 시를 준비해야 했던 조지훈은 그해 11월에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 ‘승무’를 완성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0년에 ‘봉황수’로 마지막 세 번째 추천을 받게 된다.

▲ 지훈문학관에 있는 ‘청록집’.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조지훈은 공동시집인 청록집을 1946년에 출간하게 된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피난지인 대구에서 그의 첫 개인 시집인 <풀잎단장>을 낸다. 표지 제호는 당시 7살이었던 조지훈의 큰아들이 크레파스로 썼다.

조지훈은 22살 되던 해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간다. 고대문화에 실린 그의 글 ‘나의 역정’에 따르면 ‘자기 침잠의 공부에 들었던 시기’였다. 일제의 식민정책은 날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졌다. <문장>지가 폐간 되었고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월정사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술을 마시고 목 놓아 울다가 졸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병을 얻은 그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병에서 회복한 조지훈이 찾아간 곳이 경주에 살던 박목월의 집이었다. 조지훈의 시 ‘완화삼’에 박목월은 ‘나그네’로 화답했다는 일화가 이때 생기게 된 것이다.   

▲ 지훈문학관에 있는 조지훈의 첫 개인시집 ‘풀잎단장’.

주실마을 
주실마을 곳곳을 돌아본다. 주실마을에는 오래된 집이 세 채 있다. 조지훈이 태어난 호은종택은 주실마을에 처음 들어온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이 인조 때 지은 집이다. 한국전쟁 때 일부 소실 된 것을 1963년에 복구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다.  

옥천종택은 17세기 말에 건립됐다. 한양 조씨 옥천 조덕린이 살던 집이다. 조덕린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와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다. 

▲ 옥천종택.

옥천 조덕린의 손자인 월하 조운도의 발의로 한양 조씨, 야성 정씨, 함양 오씨가 주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 영조49년(1773년)에 건립한 월록서당도 있다.  

▲ 월록서당.

마을의 내력을 알 수 있는 집들을 돌아보고 지훈문학관을 들렀다. 문학관을 돌아보며 조지훈의 시와 문학세계, 학문세계, 가족사, 생활사 등을 알아보고 마을 위에 있는 시비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조지훈의 시를 새긴 시비가 공원에 가득하다. 

시비공원에서 내려와 마을 앞 개울가 둑방을 걸었다. 코스모스 피어난 둑방에 서서 저녁 산 아래에서 숨을 고르는 시인의 마을을 바라보았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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