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역사를 함께 바라보는 아빠와 아들
질곡의 역사를 함께 바라보는 아빠와 아들
  • 나무신문
  • 승인 2016.10.0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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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 정동 일대
▲ 정동전망대에서 본 덕수궁과 서울 도심.

#여행 #장태동 #서울 #정동전망대 #덕수궁 #을사늑약 #중명전 #경교장 #러시아공사관

특별하게 할 일도 없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날 방구들 지고 뒹굴거리는데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기 시작할 때 드디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둘째를 꼬여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구름 낀 하늘 아래 날은 선선하다. 인왕산? 경복궁? 삼청동? 둘째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시내버스는 출발했고 인터넷 검색은 시작됐다. 둘째와 합의한 곳은 정동전망대였다. 

▲ 구 신아일보사 별관 건물.

도심에서 도심을 내려보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길 왼쪽에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 1동 빌딩이 보인다. 그 빌딩에 정동전망대가 있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직장인들이 가득한 빌딩 엘리베이터에 나와 둘째는 슬리퍼를 신고 배낭을 메고 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관광객인 척 하며 전망대에 도착했다. 

▲ 정동전망대 창을 통해 본 서울 도심. 덕수궁도 보인다.

선선한 바람 부는 옥상 전망대를 생각했는데 유리창으로 막힌 곳이었다.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전망을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음료를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둘째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니가 웬일로 책을 다 읽냐?” 

“이런데 와서는 책을 읽어줘야 하는 거야 아빠!”

둘째가 책을 읽는 사이 통유리로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덕수궁이 한 눈에 보인다. 서울시청과 서울도서관, 덕수궁돌담길, 중명전, 옛 러시아공사관, 대한성공회성당 등이 덕수궁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그 뒤로 도심의 빌딩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그 넘어 인왕산과 북악산, 멀리 북한산 능선이 보인다. 

▲ 정동전망대에서 본 인왕산.

풍경을 즐기고 돌아와서 둘째 옆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는 책을 덮고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래야지, 그래야 너 답지!” 둘째가 빙그레 웃으며 슬쩍 자리를 뜬다. “아빠 나도 전망 좀 구경하고 올게”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정동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 속으로 내려간다. 덕수궁돌담길을 걸어서 중명전에 도착했다. 중명전 일대는 1800년대 후반 서양 선교사들이 살던 곳이었다. 1897년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 때 중명전 일대가 궁궐로 편입 됐다. 중명전은 왕실도서관이었다. 

▲ 중명전.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의 현장이었다. 을사늑약 이전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게 한다.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일본의 계략이 공식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8월22일에는 제1차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해서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권을 박탈한다.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열강들의 눈치를 보던 일본은 당시 러일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1905년에 미국과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묵인 받았다. 

또 그해 8월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체결하면서 영국도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묵인하게 된다. 

열강들의 묵인을 등에 업은 일본은 마지막으로 대한제국 정부의 승인만 받으면 되는데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일본의 강압과 협박은 계속 이어졌다. 

서울 도심 곳곳에 무장한 일본군들이 배치되었고 심지어 무장한 일본군인들이 궁궐에 들어와 설치기까지 했다. 

결국 일제의 강압과 위협에 다섯 명의 관료들이 조약체결에 찬성하게 됐고 그 사람들을 ‘을사오적’이라고 부른다. 을사늑약의 강압적인 체결 장소가 중명전이었다.     

유리창에 남은 두 개의 총탄 자국, 암살
중명전은 현재 공사중이라 밖에서 건물만 바라봐야 했다. 중명전에서 돌아나와 정동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 문.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옛 러시아공사관은 1896년부터 약 1년 동안 고종이 머물렀던 곳이다. 이를 두고 ‘아관파천’이라고 말한다. 

조선의 왕이 왕이 있어야 할 궁궐에 있지 못하고 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피신해야 했던 서글픈 역사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

러시아는 이때를 틈타 압록강 부근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광산채굴권 등을 따내게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다른 열강들도 승냥이떼처럼 몰려들어 여러 분야의 개발 권리를 싼 값에 가져가게 된다. 그야말로 열강에 의해 조선은 갈갈이 찢기고 도둑맞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된 둘째가 던진 한마디, “이런 강도 같은 놈들” 

▲ 정동전망대에서 본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

이날 여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향신문사 앞 사거리를 건너 강북삼성병원으로 향한다. “아빠 병원은 왜?” “응 여기에는 경교장이 있다.”

경교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가 머물던 곳이자 환국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다. 이곳은 원래 당시 부자였던 최창학의 집이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경교장으로 사용했다. 

▲ 경교장.
▲ 경교장 내부. 옛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운동, 남북협상 등 산더미 같은 국무를 처리해가며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을 돌보던 곳이었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29일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는 서거한다.

▲ 경교장 2층 창문에 총알이 관통한 흔적을 복원했다. 김구 선생이 암살 당한 창문의 총알 자국을 복원한 것이다.

경교장 2층에 올라가면 그날의 총탄 자국을 재현한 유리창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총알이 관총한 당시의 유리창은 아니지만 두 발의 총탄이 뚫고 지나간 구멍과 금이 간 자국에 마음이 아프다. 
“아빠 근데 안두희는 왜 김구 선생님을 죽였어?” 

“그 얘기는 길다. 집에 가서 얘기해 줄게”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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