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의 반구정에서 이율곡의 화석정까지
황희의 반구정에서 이율곡의 화석정까지
  • 나무신문
  • 승인 2016.09.2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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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경기도 파주시 반구정길
▲ 건널목을 건넌다. 임진강역이 옆에 있다.

#여행 #장태동 #황희 #반구정 #화석정 #이율곡 #반구정길 #파주시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 세종 때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를 18년 동안 지킨 황희가 공직에서 물러난 뒤 정자를 짓고 살던 반구정에서 조선 중기에 태어나 아홉 번 치른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했던 신동 이율곡과 관련된 유적지 화석정까지 12㎞를 걷는다. 이 길 이름이 반구정길이다. 

▲ 반구정. 임진강이 흐른다

갈매기와 노닐던 황희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십오리 지점에 있는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였다. 매일 조수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날아드는데 주위가 너무도 편편하여 광야도 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고 구월쯤 되면 철새들이 첫 선을 보이기 시작하며 서쪽으로는 바다의 입구까지 삼십리 가량 된다. - 허목이 쓴 반구정기 중 일부 -’

황희가 세상을 뜬 뒤 이백여 년이 지난 뒤에 그의 후손이 폐허가 된 반구정을 다시 짓고 황희가 지은 이름인 반구정을 그대로 사용했다. 허목이라는 사람이 반구정을 찾아와 ‘반구정기’라는 글을 썼다. 

비 내리는 아침 반구정에는 갈매기가 날아들지 않는다. 황희의 시선이 머물던 임진강을 바라본다. 조선시대 공직에서 물러난 늙은 정치인은 그 강가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후대에 황희의 흔적을 찾아와서 글을 남긴 허목은 또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만 이곳은 지금 철조망의 긴장이 강물의 깊이를 가늠하게 할 뿐이다. 비를 맞으며 반구정을 나선다. 

▲ 반구정.

반구정 주차장 앞에서 반구정길이 시작된다. 굴다리를 지나면 옛 찻길이 나온다. 좌회전해서 걷는다. 가끔 지나다니는 차만 조심하면 아스팔트 포장도로도 걸을 만 하다. 

▲ 옛 도로를 따라 걷는다.

도랑물소리가 들린다. 논에 자라는 생명들을 키우는 생명수다. 도랑 옆에 난 길을 따라 걷는다. 열기 머금은 습기에 풀 향기가 담겼다. 

건널목 건너 펼쳐지는 풍경
바람 부는 논길을 따라 걷는 길 앞에 기찻길이 나왔다. 차단기가 있는 건널목이다. 건널목을 건넌다. 경의선 철도다. 왼쪽에 임진강역 플랫폼이 보인다. 

▲ 꽃과 강아지풀.

건널목을 지나면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건너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키 작은 꽃들이 길가에 피었다. 

▲ 논이 넓게 펼쳐진다.

도로를 건너면 길은 논 옆에 난 농로로 이어진다. 강아지풀과 개망초꽃이 피어난 논길이 평온하다. 

비는 계속 오락가락 한다. 땀과 빗물이 섞여 얼굴을 적신다. 몸의 열기가 식는다. 논길이라 쉴 곳 없는 그곳에서 휴식은 천천히 걷는 것이다. 

비 걱정에 논에 나온 농부의 자전거가 논길에 있다. 논 가운데 농부의 굽은 등만 보인다. 논 옆에 하얀 새 한 마리가 보인다. 농부의 시간과 새의 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논에서 만났다. 

▲ 춤추는 새.

장산1리에 도착했다. 가게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신다. 마을 아줌마들이 마을회관에 모였다. 밥 짓는 냄새가 난다. 시장기가 돌았지만 궂은 날씨 탓에 마을회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맨밧골을 지날 무렵 빗줄기가 굵어진다.  
     
8살 이율곡이 지은 시
맨밧골에서 장산전망대로 가는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대형 관광버스 몇 대가 연이어 내려온다. 좁은 도로 탓에 길가에 간신히 비켜선다. 버스가 다 지나간 뒤에 오르막길로 올라간다. 빗줄기는 더 굵어져 장대비가 됐다. 

▲ 장산전망대에서 본 임진강. 가운데 초평도가 보인다.

온 몸이 비에 다 젖었다. 몸에 열기가 다 식었다. 다 젖었지만 그편이 오히려 나았다. 그렇게 장산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 너른 터에 원두막이 하나 보인다. 원두막에서 비를 피하면서 풍경을 바라본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다 가렸다. 장대비가 먼 데 풍경을 뿌옇게 물들인다. 임진강에 있는 섬, 초평도가 흐릿하게 보인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냥 빗속으로 들어갔다. 숲속 넓은 흙길을 걷는데 뱀 한 마리가 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간다. 사람 기척에 뱀도 놀랐고 뱀을 보고 나도 놀랐다. 

숲에서 나온 길은 차가 다니는 도로를 건너 마을로 들어간다. 장단콩으로 두부를 빚는다는 식당이 있다. 비도 피할 겸 식당으로 들어갔다. 온몸이 흠뻑 젖은, 흰머리 장발에 콧수염의 사내를 식당 아줌마는 싱글싱글 웃으며 반긴다. 

▲ 장단가든의 순두부.

순두부백반을 시켰다. 민물매운탕도 있고 장단콩으로 만든 갖은 요리를 다 먹을 수 있는 코스정식도 있는데 혼자라서 순두부백반을 시켰다. 옆 식탁에 펼쳐진 갖은 요리의 향연도 부럽지 않았다. 직접 만든 순두부를 더 달라고 해서 두 사발을 먹었다.

▲ 화석정.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화석정이 있었다. 화석정은 세종25년(1443년)에 율곡의 5대조 이명신이 지었다. 성종9년(1478년)에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고 이숙함이 ‘화석정’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 화석정. 정자 아래 임진강이 흐른다.

화석정 옆에 56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 230년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정자와 오래된 나무가 있는 풍경을 완성시키는 것은 정자 옆에 있는 비석 하나다. 이율곡이 8살 때 지었다는 화석정시를 새긴 비석이다.  

▲ 화석정시가 새겨진 시비.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 이율곡이 8살 때 지은 <화석정시> -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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