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장태동 #강원도 #오대산 #평창
엊그제 일 같은데 그게 벌써 4~5년이나 됐구나! 4~5년 맞나?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러니까 일은 그렇게 시작 된 것이다.
노는 사람들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다가 접은 사람 A, 국내에서 사업을 하다가 쉬게 된 사람 B, 학원에서 일하다가 일을 놓은 사람 C, 그리고 일 있을 땐 프리랜서고 일 없으면 백수인 나, 이렇게 넷이 모이다 보니 우연치 않게 무슨무슨 모임 아닌 모임이 된 거다.
나야 십여 년 전부터 ‘반 백수’였지만 셋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다 일손을 놓은 거다.
좋게 말하면 다음 사업을 위한 준비 기간이자 그동안 고생한 자신의 몸과 마음에게 주는 휴가인 셈이고 그냥 막 말하면 ‘좀 놀자’였다.
우리들은 평일 주말 낮 밤을 가리지 않고 누구 하나가 “야! 어디어디로 몇 시까지 모여”하면 그 한 마디에 어디로든 떠났다.
이른바 우리는 ‘노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렇게 떠돌았다. 그런데 모여서 보니 네 명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 거였다. 모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체형의 ‘우량아?’가 아니라 ‘우량어른’이었다.
옛날 쌀 한 가마니의 무게를 기준으로 봤을 때 기준점을 넘어 상당히 상회하는 무게의 ‘우량어른’들이 모여서 한다는 일이 자가용을 타고 여기저기 구석구석 들쑤시고 다니면서 맛있는 음식에 동서고금을 막론한 주(酒)님을 영접하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만나면 만날수록 날씬(?)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점점 더 우량해지는 거였다. 그날도 이것저것 음식을 시키고 엄청 먹어대고 있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자신의 신체와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스스로 발톱을 깎을 수 없다느니, 사우나에 들어가면 답답하고 죽을 거 같아서 1분도 못 버틴다느니, 코골이에 무호흡 증상까지 더해져 옆에서 자는 사람을 놀라게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라느니...
혈압 수치와 당 지수 이야기 보다 더 피부에 와 닿는 말들이 수 없이 쏟아졌다. 좀처럼 끊이지 않을 것 같은 말 중간에 누가 이렇게 외쳤다. “야! 산에 가자” 그렇게 노는 사람들의 산행은 시작 되었다.
산사람이 되는 듯 했다
한 사람은 군대에 있을 때 산악구보의 달인이었다며 너스레를 떨고, 나는 소싯적에 ‘지리산 다람쥐’였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머지 둘은 안 그래도 요즘 동네 뒷산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꺼냈다.
호기 좋게 찾아간 관악산에서 넷은 퍼졌다. 정상은 아예 꿈도 꿀 게 아니었다. 중턱도 못가서 퍼졌다. 퍼진 게 아니라 아예 퍼질러졌다. 산악구보의 달인도 지리산 다람쥐도 마찬가지였고 동네 뒷산을 다녔다던 두 명이 간신히 살아남아 완전히 퍼질러진 둘에게 커피도 타 주고 먹을 것도 건네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산행은 ‘죽기살기’의 산행이 되었고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산을 올랐다. 어떨 땐 연속 이틀 삼일 산을 찾았다. 그래도 정상은 쉽게 넘볼 일이 아니었지만 고도를 조금씩 높여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관악산 정상에 첫발을 디디는 날이 왔다. 관악산 정상에 처음 올랐던 그 순간 바람이 온 몸을 애무하며 지나가는데, 그 느낌이 그 촉감 그 향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북한산을 밟았고 경기도 권으로 넓혀서 운악산, 명지산, 축령산, 예봉산~운길산 등등... ‘노는 사람들’이 ‘산사람’이 되는 듯 했다.
다시 오대산
산에 다니면서도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셨다. 산에서 내려오면 산 아래 식당에 들러 배가 터지도록 먹고 취하도록 마셨다. 그게 일이었고 그게 좋았다. 그러니까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그렇게 먹고 놀았던 거다.
노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다행히 술을 못 먹기도 하고 안 마시기도 했으므로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도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차를 세우고 먹고 놀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해를 두 번 넘겼고 그 사이에 노는 사람들은 하나 둘 씩 자기 일을 찾았다. 간혹 만나기는 했으나 서울이 고작이었고 산이 아니라 술집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만에 연통이 날라 왔다. “야! 오대산 가자”
생업전선에서 지친 사장님들이 날린 SOS 신호였다. ‘새벽 5시20분, 서울 모처로 집결’. 곤지암에서 ‘소머리국밥 특’으로 이른 아침을 한 그릇씩 먹고 진고개 정상 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9시30분.
매점에서 물과 음료 간식꺼리를 잔뜩 사서 배낭에 넣고 출발. 왕복 8km, 고도차 500m 정도 되는 산행에 비하면 먹을 것이 과했다.
‘산사람’이 될 뻔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해발 900m에 펼쳐진 산 속 평원지대를 지나 숲으로 들어가는 데 벌써 ‘헉, 헉’ 대기 시작한다.
초반부터 등장한 가파른 계단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퍼질러졌던 관악산 그 산길이 생각났다. 그때는 나와 또 다른 한 사람이 그렇게 퍼질러졌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이 그 지경이 되기 직전이다.
5분 걷고 5분 쉬기를 반복하며 억지로 계단을 올랐다. 급기야 “야! 니네 갔다와라 난 여기서 쉴테니!”란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을 봤다. 그 말이 안 나올 수 없는 얼굴이었다.
관악산에서처럼 물과 음료를 마시며 충분히 쉬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아마도 그때 숨이 트인 것 같다. 몸이 산을 기억하는 지 조금씩 정상을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오대산 노인봉 정상에 섰다. 한참 동안 정상에 부는 바람을 즐겼다. 관악산 정상을 처음 밟았을 때처럼.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누구는 다리에 쥐가 나기도 하고 발뒤꿈치에 상처가 나기도 했지만 얼굴은 오대산 공기처럼 해맑게 빛났다.
벌써부터 배가 고픈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진고개에서 강릉방향으로 차를 달리다가 고개길 옆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산채비빔밥을 시켰다. ‘노는 사람들’이 한참 놀고다닐 때 언제나 그랬듯이 ‘밥 추가 반찬 추가’를 외치는 소리가 오대산 자락에 가득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