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나이테로 역사 알아보기
나무의 나이테로 역사 알아보기
  • 김오윤 기자
  • 승인 2016.03.0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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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목재 100문 100답 57 - 한국임업진흥원 시험평가팀

[나무신문 | 한국임업진흥원 시험평가팀] 이번 회에서는 56회에 설명한 연륜고고학의 내용을 바탕으로 융릉의 정자각과 비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융릉에 대해 알아보기에 앞서 우선 조선시대 왕실의 묘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조선시대 왕실의 묘제는 능(陵), 원(園), 묘(墓)로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능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이며 원은 왕의 사친 및 왕세자와 왕세자비의 무덤이고 묘는 능ㆍ원 이외의 무덤으로 폐위된 왕, 대군, 공주, 옹주, 후궁 등의 무덤으로 위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고 있다. 

융릉은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위치한 장조로 추존된 장헌(사도)세자와 헌경왕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으로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인 건릉(健陵)과 함께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에는 융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가 일괄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문화재청 2009).

▲ 융릉 전경 사진.
▲ ※ 사진출처 : 문화재청
▲ 융릉의 일상(융릉의 정자각).
▲ ※ 사진출처 : 문화재청

융릉의 역사 
융릉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1762년 5월21일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사도세자는 그해 7월23일 양주군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 후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 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에서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쳤다.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고치고 능을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화성으로 옮겼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해 이듬해 1816년(순조 16) 3월3일 현륭원에 합장했다. 1899년(광무 3) 11월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리고 능 이름을 융릉이라 하였으며, 12월19일에는 묘호를 장종에서 장조로 바꾸고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했다(문화재청 2009).

조선 왕릉 앞에는 제사를 드리는 정자각과 비를 설치하는 비각이 있으며, 이곳에 사용된 목재 부재를 중심으로 연륜연대 분석을 통하여 건물의 건축역사를 밝혔다.

연륜고고학으로 본 융릉의 역사
연륜연대분석법은 나무의 연륜(나이테) 패턴을 관찰해 연륜 하나하나에 절대연대를 부여하는 것으로써, 이를 통해 건축물의 건축연대와 수리시기 등을 알 수 있다(박 등 2006, 김 2009, 박 등 2009). 미지의 목재에 절대연도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연대를 모르는 목재에 포함되어 있는 연륜을 1년 단위로 너비를 측정해 연대기를 작성한 후 마스터연대기와 비교를 통해 절대연도를 부여한다. 마스터연대기는 살아있는 나무의 연륜연대기와 중첩시켜 이미 절대연대가 부여된 연륜폭 곡선을 말한다. 만약 연대를 모르는 미지의 목재가 수피를 포함하고 있다면 마지막 나이테의 연도 즉 벌채연도를 알아내어 1년 단위의 정확한 연대 측정이 가능하다.   

융릉의 정자각에서 50점, 비각에서 4점 총 54점의 부재를 이용하여 160년의 연대기가 작성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융릉 연대기를 마스터연대기와 비교한 결과 1628년~1787년이라는 절대연대가 부여되었다.

시료의 마지막 연륜이 수피를 가지고 있으면서 만재가 완전하게 형성된 것이 9점이었으며 조재만 형성된 것이 10점 이었으며 이들 시료의 마지막 연도는 1784년~1787년이었다. 생육환경에 따라 조재와 만재의 형성시기가 다소 다르지만 마지막 연륜에 조재 형성이 완료된 것은 벌채 시기가 그 해 여름이며, 부재에 수피가 존재하면서 연륜이 만재까지 형성이 완료된 것은 벌채 시기가 형성층 휴지기인 그 해 늦가을~그 다음 해 초봄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융릉 정자각과 비각에 사용된 목재 중 수피가 존재하는 부재는 1784년 여름철에서 1788년 초봄사이에 벌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양주군 배봉산에 위치한 장헌(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을 융릉으로 천장하게 된 것은 1789년(정조 13년) 7월11일(음력) 박명원의 상소로 결정되어 7월20일에 공사가 시작되었다(문화재청 2009). 융릉 정자각과 비각은 8월26일 정초(定礎)하고 9월3일 상량하게 된다. 연륜연대 측정 결과에서 1789년에 벌채된 목재는 하나도 없지만 이는 융릉의 공사가 결정되고 목재를 수급한 것이 아니고 사전에 목재가 준비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륜연대 결과가 1785년에서 1787년까지 대부분의 목재가 벌채된 것으로 나타나 공사개시 2~3년 전에 이미 재목이 비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연륜연대를 통해 현재의 융릉 정자각과 비각 건물은 장헌(사도)세자의 영우원을 1789년 화성으로 이장할 때 건립된 것으로 220년동안 원형이 잘 보존되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나무의 나이테를 통해 역사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문헌과 구언이 아닌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오정애, 박원규. 2010. “융릉 정자각 및 비각 목부재의 연륜연대 분석”. 한국가구학회지 21(5). 424-431.
2. 문화재청. 2009. 화성융릉 정자각 및 비각 수리보고서: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