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문학기행길을 걷다(2)
태백산맥문학기행길을 걷다(2)
  • 나무신문
  • 승인 2016.01.2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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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전남 보성군 벌교읍

김범우의 집에서 보성여관(남도여관)까지
소화다리를 뒤로하고 벌교천을 따라 걷는다. 벌교천에 놓인 홍교가 보인다. 홍교를 건너려면 좌회전해야 하는데 그 전에 들러볼 곳이 있다. 소설 <태백산맥>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한 축인 김범우의 집이다.

김범우는 일제강점기에 학병으로 군에 가담하지만 미군의 포로가 되어 OSS 훈련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순천중학의 선생님이 된다. 또 다른 주인공인 염상진의 좌익도, 자본주의에도 마음을 두지 못한 그는 한때는 봉건적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민족주의 통일 노선을 지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한국전쟁 때에는 좌익에 가담해서 도당 문화선전부에서 일하기도 하고 미군 통역원으로 전쟁에 가담하기도 하고 인민군 통역관 노릇도 한다. 

▲ 홍교.

김범우의 집을 잠깐 보고 나와 홍교를 건넌다. 홍교는 벌교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조선시대 영조5년(1729년)에 순천 선암사 승려 초안과 습성이 만들었다. 보물 제304호로 지정됐다. 

홍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 부근에 뗏목으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뗏목다리’를 한자로 옮긴 게 벌교(筏橋)다. 다리 이름이 지명이 됐다. 

그러니까 현재 남아 있는 홍교의 전신이 벌교이고 그 벌교가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홍교를 없애려고 했다. 

▲ 자애병원 자리. 지금은 벌교어린이집이 들어섰다

이 지역의 상징이자 벌교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홍교를 지키기 위해 벌교 사람들은 갖은 노력을 했고 결국 홍교를 지켜냈다. 

홍교를 건너 좌회전해서 조금만 더 가면 소설 속에 나오는 자애병원 자리가 있다. 지금은 벌교어린이집이 들어섰다. 당시에 실제로 후생병원이 있던 곳이다. 

발길을 옮겨 부용산공원으로 향한다. 부용산공원길로 올라가기 전에 <도라지타령> <독립축전곡> 등을 만든 민족음악가 채동선의 생가를 먼저 보게 된다. 생가를 뒤로하고 오르막길을 따라 올라가면 벌교 읍내가 보이는 곳이 나온다. 벌교 읍내를 한 눈에 넣고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벽화가 있는 마을을 지나 옛 금융조합 건물 앞에 서게 된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원형 그대로다.     

▲ 벽화마을.

그 다음에 나오는 곳이 보성여관(남도여관)이다. 일제강점기에 보성여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했던 곳이고 지금도 영업을 한다. 2층에 올라가면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소설에서  남도여관으로 나온다.     

▲ 보성여관 2층 옛 모습이 남아 있다.

보성여관을 둘러보고 나와서 벌교역 방향으로 걷는다. 벌교역 가기 전에 오래된 식당을 발견했다. 벌교역이 태백산맥문학기행길의 중간 지점 정도 되니까 이쯤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 꼬막정식 한 상.

겨울 별미 벌교 꼬막

▲ 꼬막정식에 나온 양념꼬막.

식당 곳곳에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보인다. 꼬막으로 맛 볼 수 있는 여러 요리가 한 상에 오르는 꼬막정식을 시켰다. 

식탁 위에 통꼬막, 꼬막회무침, 양념꼬막, 꼬막전이 올랐다. 통꼬막은 꼬막을 살짝 데치기만 한 것이다. 꼬막 까는 도구를 이용하여 꼬막 뒤꽁무니를 벌리면 꼬막은 벌어지고 그 속에 핏기 남은 꼬막살이 들어있다. 

양념꼬막은 꼬막을 삶아 양념간장을 뿌린 것이다. 짭조름한 양념과 쫄깃한 꼬막살의 맛이 잘 어울린다. 꼬막전은 꼬막을 넣고 부친 전이다.    

꼬막회무침은 꼬막살과 각종 채소를 넣고 매콤, 새콤, 달콤하게 무친 요리다. 꼬막회무침을 넣고 밥을 비벼먹어도 맛있다. 술과 곁들이는 안주로도 좋다. 

▲ 꼬막정식에 나온 꼬막무침.

식탁에 올라온 꼬막요리의 면면이 이러하니 밥상이 술상이 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지방에 가면 그 지역의 술을 먹어야 한다. 남도에는 이름도 예쁜 잎새주가 있지 않는가! 소주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소주가 잎새주다. 

낮 1시30분 쯤에 첫 잔을 따르고 마신다. 핏기 남은 통꼬막을 섭렵한다. 한 병을 다 마시는 데 통꼬막 대여섯 개면 충분했다. 친구도 꼬막 앞에서 돌아갈 길을 버리고 술잔을 선택했다. 원래 술을 많이 먹지 않지만 혹시라도 돌아갈 길을 위해 자제하는 친구의 몫까지 내가 먹었다.  

술상이 된 식탁 위에 술병은 늘어나고 꼬막은 점점 바닥을 보였다. 꼬막을 다 먹고 나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친구는 차에서 자라고 하고 혼자 걸었다. 

철다리에서 중도방죽을 지나 다시 소화다리까지
꼬막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겨울 오후의 햇볕이 철다리가 놓인 벌교천에 그렁그렁하다. 
1930년 경 만들어진 철다리는 <태백산맥>의 인물 염상구 때문에 유명해졌다. 일제강점기에 철다리 아래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일본 선원을 죽이고 도망친 염상구가 해방과 함께 벌교에 돌아오게 된다. 

▲ 염상구가 배짱싸움을 한 철다리.

벌교에는 깡패 왕초인 ‘땅벌’이 있었고 염상구는 벌교 주먹패의 주도권을 놓고 ‘땅벌’과 한 판 싸움을 벌이는데 그 싸움이 ‘배짱싸움’이었다.

기차가 오는 철다리 위에서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였다. 염상구가 승리했다. 벌교 주먹패의 주도권은 염상구가 잡게 되었다.      

철다리에서 중도방죽으로 걷는다. 중도방죽은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실제로 살았던 일본인 ‘중도(나카시마)’의 이름을 따다 붙인 이름이다. 중도방죽에 대한 내용이 소설에 이렇게 나온다.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 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놈덜이었응께...’ 

중도방죽길을 걷다보면 ‘선수(진석) 3㎞’라고 적힌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정표대로 가지 말고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농로를 따라 가야 한다. 

▲ 농로.
▲ 소화다리 위에 초생달이 떴다.

농로를 따라 걷다가 제석정미소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뒤 농로 끝에서 또 좌회전 해서 굴다리를 통과하면 된다. 굴다리 다음에 나오는 LPG가스를 파는 건물을 지나 바로 우회전해서 가다가 건널목을 지나고 마을 골목길을 지나면 큰 도로가 나온다. 거기서 좌회전해서 가다보면 태백산맥문학기행길의 도착지점인 벌교시외버스터미널이 나온다.   

해는 이미 졌다. 차에서 자고 있는 친구를 깨워 저녁을 먹으러 갔다. 소화다리 옆 식당으로 들어가 꼬막무침백반과 짱뚱어탕을 시켰다. 

사실 벌교의 꼬막은 예전에는 밥상에 오르는 반찬이었다. 지금처럼 꼬막이 벌교 음식의 상징이 되기 전에는 짱뚱어탕이 유명했었다. 

짱뚱어탕과 꼬막무침백반, 벌교를 대표하는 두 음식으로 벌교의 저녁 만찬을 즐기고 소화다리로 나왔다. 어둠이 내린 벌교천에 소화다리 불빛이 환하다. 불빛이 닿지 않는 하늘 먼 곳에 소화를 닮은 초생달이 떴다. 

▲ 짱뚱어탕.

술이 깬 친구가 한 마디 말을 던진다. “야! 여수로 가자”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