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의 자연과 역사
완도의 자연과 역사
  • 나무신문
  • 승인 2015.12.2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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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전남 완도
▲ 완도수목원

오랜만에 완도행
25~26년 전 나는 완도 앞바다에 떠있었다. 떠 있던 시간의 반 이상은 갇혀있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상황이었다. 

길고 좁은 쪽배에는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낚시에 흥미가 없었던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일행과 취기 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일렁이는 파도에 배가 흔들린 지 두세 시간 쯤 되었을까? 배가 일렁일 때마다 내 배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신나게 낚시를 즐기는 일행들에게 돌아가자는 말을 하기 미안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렇게 또 두세 시간이 흘렀고 드디어 화장실까지 급해졌다. 위아래로 나올 것 같은 그 아찔한 상황에서 돌아가자는 말을 꺼냈지만 대물을 영접하지 못했다는 그들은 마지막 30분, 마지막 20분, 마지막 10분까지 외치며 결국 1시간을 더 채우고 나서야 낚싯대를 걷고 노를 젓기 시작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노랗게 질린 얼굴이 그동안의 역경을 대변해주고 있었지만 지국총 지국총 저어야 움직이는 그 쪽배는 왜 그렇게 더디게 움직이던 지...

아무튼 울렁거리는 속은 육지에 올라서자 진정됐고 급했던 화장실은 ‘이월상품대방출’처럼 시원하게 해결했다. 

이어지는 저녁과 밤은 온전히 육지의 것이어서 잡은 고기에 얻은 고기를 얹어 소주부터 맥주까지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완도의 밤을 삼켜버렸다. 

그 이후에도 완도는 몇 차례 갔었지만 하룻밤의 진한 기억 없이 그냥 흘러가는 여행지 중 한 곳이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 찾은 완도에는 비가 내렸다.    

▲ 완도수목원에 핀 동백꽃

완도수목원
비 내리는 수목원은 초록이 더 빛난다. 난대림수목원인 완도수목원은 그렇게 빛나는 초록으로 나를 반긴다. 

안내 하는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산 전체가 수목원이기 때문에 자세히 돌아보려면 한 이틀은 봐야 한단다. 나는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일행이 있었고 일정이 있었다. 

일정에 맞춰 가장 간단한 코스로 돌아봤다. 저수지를 지나 얼룩식물원에 접어들었다. 얼룩식물원은 잎이나 줄기가 알록달록한 식물을 모아 놓은 곳이다. 금선개나리, 산반무늬느티나무, 화백스노우, 황금일본매자나무, 황금회화나무, 흰갈풀, 무늬자란 등이 있다고 하는데 이날은 국화과 식물인 오리오마클라텀만 봤다. 

길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데 아열대온실 이정표를 따라 움직인다. 아열대온실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북바위 또는 두꺼비바위라고 한다. 모양이 그렇게 생겨서 붙은 이름이란다. 

완도수목원을 조성할 때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힘들면 이 바위에 앉아 쉬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이곳 주변 마을 사람들이 땔감을 운반하던 중에 이 바위에서 쉬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 바위는 사람들을 쉬게 하는 바위다. 

▲ 완도수목원 저수지
▲ 완도수목원 아열대온실

이 온실은 열대식물과 아열대식물, 선인장, 다육식물 등을 전시하는 곳이다. 워싱턴야자, 카나리야자, 코코스야자, 비로야자 등 야자나무류와 고무나무, 꽃생강, 문주란, 몬스테라 등 관엽식물도 있다. 빵나무와 바나나, 과바 등 열대과일이나 아열대과일도 있고 허브식물 등도 볼 수 있다. 선인장으로 만든 하트 모양이 눈에 띈다. 

▲ 선인장으로 만든 하트모양
▲ 완도수목원에서 본 얼룩무늬가 있는 식물 ‘오리오마클라텀’

길은 아스팔트지만 나무가 빽빽해서 숲길 같다.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 곳에 산림박물관이 있었다. 한옥 건물이 자연 속에 운치 있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면 동백나무군락이 있는 동백나무원을 지나게 되고 길은 다시 처음에 보았던 저수지로 이어진다.   

▲ 완도수목원 저수지

청해진유적지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린다. 검은 구름이 낮게 떠서 하늘이 무거워 보인다. 그런 하늘과 바다 사이에 엎드린 작은 섬, 청해진 유적지로 들어간다. 

완도 청해진 유적은 사적 제308호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발굴조사를 해서 성벽, 건물지, 섬 입구의 판축유구와 우물, 목책 등을 확인했고 2171점의 유물을 발굴했다. 

▲ 장보고기념관

바다에 놓인 구름다리를 건너 우물 앞 외성문을 지난다. 청해진 성벽은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고르고 다져서 만드는 판축기법으로 쌓았다. 성 안에 판축기법의 예를 보여주는 시설물이 있다. 내성문을 지나면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건물인 고대가 있다. 고대는 일본과 중국 등 외국에서 내륙으로 오가는 상선과 해적을 감시하던 곳이다. 

동남치는 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전망지인데, 이곳에서 완도읍 방향도 보고 바깥쪽 바다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배를 살피기도 했다. 성벽 중앙에서 서북치 방향은 강진과 해남 쪽에서 들어오는 배를 감시하기에 좋다. 

▲ 장보고 무역선.

청해진 유적지는 장보고의 일대기를 통해 더 빛난다. 장보고 기념관 자료에 따르면 장보고는 780년대 후반에 청해(현 완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궁복’ 또는 ‘궁파’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장보고는 어린 시절 당나라로 갔다. 당나라 강소성 서주의 무령군이라는 군대에 들어가 공을 세워서 30세에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는 무령군중소장의 자리에 오른다.  

산동반도 적산포에 적산법화원을 세워 활동하면서 당나라에 있는 신라인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해적에게 잡혀 노비로 팔려온 신라사람을 ‘신라노’라고 했는데 장보고는 ‘신라노’의 참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이때에 신라로 돌아가게 되면 해적을 소탕하고 바닷길을 개척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는 지위를 얻으면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대사로 임명됐다. 대사는 청해진 지역을 다스리는 자치권을 가진 우두머리였다.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했다. 

▲ 청해진유적지 안에 있는 건물

청해진은 일본과 중국 등 바닷길을 개척하는 중심기지였으며 이를 토대로 여러 나라와 중계무역을 하는 본거지가 됐다. 

중국와 일본에도 거점을 확보한 장보고는 한중일을 잇는 해상무역은 물론이고 중국 남부지역까지 진출하여 아라비아상인들과 교역을 하면서 이슬람 문화의 도자기와 유리제품을 신라와 일본에 공급하기도 했다. 

▲ 청해진유적지 외성문 앞 우물

승승장구하는 장보고의 길을 막은 건 경주 귀족들의 시기와 음모였다. 장보고는 김우징(신무왕)이 왕에 오르는데 큰 역할을 했고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기로 하는 등 신라에서 장보고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견제하는 경주 귀족들은 841년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했다.

828년에 설치된 청해진은 23년 뒤인 851년(문성왕13)에 폐진되었고 청해진 사람들은 강제로 벽골군(현 전라북도 김제시)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 청해진유적지로 가는 구름다리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