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의 성곽이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채 인구 1000만의 도시, 서울 한 복판에 남아 있는 판에 오래된 절 한 두 개 쯤이야 뭐 그리 대수겠냐마는 성곽이야 사람 사는 마을의 경계이고 절은 세속과의 경계를 상징하는 산 그 안에 있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니 절이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온 건 참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절이 내려온 게 아니라 사람들이 생활의 경계를 넓혀 산을 치고 올라간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 없으니 절로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만 편안해 졌구나!
대웅전과 명부전
얼마 전에 서울시 강북구에 있는 화계사에 다녀왔다. 화계사는 1522년(중종17)에 생겼다. 원래는 고려 광종 때 현재 화계사 인근에 창건했던 보덕암을 지금의 화계사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이름을 화계사라고 했다.
이곳도 조선시대에는 깊은 산중이었겠으나 지금은 시내버스에서 내려 아스팔트길을 조금 걸으면 바로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 바로 옆에 참새 떼 같은 아이들이 웃고 떠들고 뜀박질하며 공부하는 중학교의 교문이 있다.
일주문과 교문이라! 세속의 때를 씻는다는 일주문, 배움의 자세를 갖춘다는 교문, 들고나는 문 하나에 뜻도 많고 얘기도 많다. 아무 생각 없이 일주문을 지나 절 마당에 도착했다.
종루 밑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서 대웅전 앞 마당에 섰다. 1870년(고종7)에 지어진 건물이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5호다.
대웅전 옆에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 불상과 시왕상은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조각했다는 설이 있다. 원래는 황해도 한 절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명부전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필체라고 한다.
절이 작아 돌아보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명부전을 지나서 마당으로 내려선다. 마당에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부처상을 만난다. 그 앞에 서면 숲이 품고 있는 절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동종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가다 손오공 조각상을 보았다. 그 옆에 조화가 한 송이 피었다. 죽은 나뭇가지를 깎아 놓은 끄트머리에 잠자리 한 마리 앉았다. 물이 담긴 절구통 안에 하얀 거북이 인형이 담겼다. 열기구를 타면서 눈을 감고 미소 짓는 동자승 인형도 보인다. 그 주변 땅에 꽃이 피어 은은하게 향기를 퍼뜨린다.
절집 앞 작은 정원에 이야기가 넘쳐흐른다. 그냥 그 앞에 앉아 있으면 말도 글도 없이 이야기가 머리에, 가슴에 남는다.
그렇게 이삼십 분이 지났다. 그리고 종루로 내려간다. 종루에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가 있다. 목어는 두 개인데 하나는 닳고 삭아서 형체를 잃었다. 종도 두 개다. 그 중 한 개가 보물로 지정됐다.
화계사 동종은 보물 제11-5호다. 1683년에 조선 후기 대표적인 승려장인 사인비구가 만들었다. 경상북도 희방사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 종루가 가득하다.
종루 아래 계단을 내려서서 커다란 나무아래 데크에 앉았다. 등 뒤에 있는 나무가 400여 년이 넘은 느티나무다. 높이가 28m다.
400년 느티나무 앞에 앉아 종소리를 듣다
화계사가 1522년(중종17)에 생겼으니까 이 나무는 절이 생기고 80~90여 년 후에 심은 것이겠다. 등이 서늘해진다.
먹구름이 파란 하늘을 가리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숲을 울리는데 저 높은 하늘에 매 한 마리가 떠서 날개만 퍼득거리며 못처럼 박혔다. 그런 풍경이 정지된 시간처럼 펼쳐지는 찰라 종소리가 퍼진다.
당목이 종에 닿는 순간 가마솥 뚜껑 깨지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그 소리는 찰라에 사라지고 공기에 파문을 일으키며 소리가 퍼진다. 소리의 파장은 공중에서 세 번 증폭된 뒤 공중에서 흩어져 산화한다.
아홉 번까지 세고 난 뒤 종치는 횟수를 헤아리지 않았다. 공중은 소리를 잉태한 자궁이자 소리가 산화하는 무덤이다. 종소리가 무겁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마을 가게 앞까지 따라온 종소리가 막걸리병을 흔든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