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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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신문
  • 승인 2015.08.17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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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충남 서산 아라메길 1코스 중 역천 둔치에서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까지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여미리는 서산 아라메길 1코스의 출발장소다. 이 마을에 있는 유기방 가옥, 여미리 비자나무, 선정묘, 석불입상, 유상묵 가옥 등을 돌아보고 역천 둔치길로 접어든다.  

 

▲ 운산면 여미리 유기방 가옥 등을 둘러보고 고풍저수지로 가는 길.

역천 둔치길에서 고풍저수지까지
여미리 마을을 벗어나 차도를 건너 농로로 접어든다. 구불거리는 농로를 지나면 물풀 가득한 시냇물이 나온다. 냇물 이름이 역천이다. 역천 둔치를 지나 둑으로 올라서서 걷는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그늘 한 점 없는 둑길을 걷는다. 소실점이 보이는 길에 아지랑이가 아른거린다. 바람 없이 열기만 고이는 길 위에서 숨이 막힌다. 물병의 물이 미지근하다. 

미평교가 나왔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리 오른쪽 둑길로 접어든다. 둑길이지만 난간이 설치되어 언뜻 보기에는 길처럼 보이지 않는다. 

논 옆 흙길을 만났다. 뱀 허물이 널브러져있는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다. 산그늘은 논바닥의 반도 덮지 못하고 끊어졌다. 하지만 포장된 길을 걸을 때 보다 덥지 않다. 
멀리 저수지 제방이 보이고 그 앞에 도로를 받치고 있는 교각이 보인다. 더 이상 길이 없을 것 같다. 

떠나기 전에 핸드폰에 내려 받은 지도를 아무리 확대해서 봐도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 지 분간하기 힘들다. 제방 앞에서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간다. 길 옆 나무와 풀섶을 자세히 살핀다. 

제방으로 가는 길 옆에 오솔길이 풀섶에 묻혔다. 풀섶 위 나무에 길을 안내하는 리본이 달렸다. 색 바랜 리본이 나뭇가지 색과 비슷해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못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 고풍저수지 위에 있는 고풍터널.

냉면 한 그릇
무릎을 덮는 풀섶길은 길지 않았다. 풀을 헤치고 도착한 곳은 고풍터널이다. 터널을 지나면 사거리다. 아라메길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아스팔트길이다. 내리 쬐는 열기보다 도로가 뿜는 열기가 더 후끈 거린다. 한여름 열기가 아래에서 솟구치고 위에서 찍어 누른다. 

▲ 고풍터널을 나와 사거리에서 이정표 따라 걷는다.

그늘 없는 아스팔트길을 한여름 한낮에 걷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걷지 않으면 길은 줄지 않는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땀에 젖은 옷이 햇볕에 마르고 또 젖는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용현계곡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반가웠다. 

식당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걷던 길에서 식당을 만났다. 허기진 배를 채울 생각에 즐거웠지만 가마솥 찜통에 들어 있는 것 같은 더위와 열기를 식힐 수 있어서 더 좋았다. 

▲ 용현계곡 입구에 있는 식당에 먹은 냉면.

사실 식당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운산면에 도착했을 때 구운계란을 넉넉하게 샀다. 어디서든 배를 채우고 쉬었다 갈 생각이었다. 

식당 문을 열자 냉기가 밀려온다. 겉으로 타고 속으로 끓고 있는 몸이 서늘해진다. 얼음 넣은 물 한 통을 다 마셨다. 그리고 냉면을 주문했다. 

식당에는 낮술을 즐기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찌개를 담은 냄비가 너저분하다. 빈 맥주병과 소주병을 전리품처럼 세워놓았다. 낮술을 시작한 지 적어도 한 시간은 넘은 듯하다. 그중 한 명이 내게 말을 건넨다. 

“처사님은 어디서 오셨소?”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말투라서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네?”라고 되묻는 말에 그는 두 세 번 또박또박 발음하려고 애를 쓴다. 그때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서울에서 왔어요. 해미읍성까지 걸어갑니다.”라며 물어보지도 않은 목적지까지 먼저 말한 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 상에 앉아 술잔을 나누며 얘기했을 법도 한데 더위에 지치고 허기에 녹초가 된데다 앞으로 걸어야할 길이 걱정이 되는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문한 냉면이 나왔고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내게 말을 걸었던 사람이 식당을 나서려는 내게 명함을 건넨다. 서산에서 오리요리전문식당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식당을 나서는 내게 여전히 혀가 꼬인 말투로 언제 한 번 오면 융숭히 대접한다는 말을 어렵게 완성시켜 인사를 한다.  

 

▲ 강댕이 미륵불.

백제의 미소를 보다
냉면 한 사발이 보약 한 재 같다. 몸에 다시 생기가 돌고 활력이 붙는다. 이제 700m 정도만 가면 ‘백제의 미소’라고 알려진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을 볼 수 있다. 

백제의 미소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를 먼저 반기는 건 강댕이미륵불이었다. 고려 말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 돌부처는 서해를 통해 이곳을 오가던 중국 사신들의 통행로에 세웠었다는 전설도 있고 인근에 있었던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이었다는 설도 있다. 

봉분처럼 생긴 꽃밭 위에 서 있는 돌부처가 방금 전에 들렀던 식당에서 낮술을 먹던 사람들을 닮은 듯도 하다. 

▲ 쥐바위.
▲ 인바위.

돌부처를 지나면 쥐와 고양이에 빗댄 설화가 내려오는 쥐바위와 옥황상제의 도장과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는 인바위가 차례로 나온다. 

인바위를 지나 드디어 백제의 미소,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 입구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너 바위절벽이 압도하는 좁은 길을 올라가서 백제의 미소를 만났다. 

▲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바위절벽에 양각된 부처님 세 분, 석가여래입상 제화갈라보살입상 미륵반가사유상. 부처가 나를 보고 웃는다. 나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안내판에 국보 84호라는 것과 함께 불상의 미소가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며 미학적 우수함과 과학적 치밀함을 두루 갖춘 것이라는 칭송의 글을 적어놓고 있다. 

▲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돌아보고 보원사지로 가는 길에서 뒤돌아서 본 풍경.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겐 지금 부처의 웃음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는 인사로만 느껴진다. 그래서 나도 ‘고생은요 뭘 오고 싶어 온 건데’라는 화답으로 웃은 거였다. 

웃음으로 만남의 인사를 했으니 웃음으로 헤어짐의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부처와 나는 그렇게 두 번씩 웃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