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양진당 尙州 養眞堂
상주 양진당 尙州 養眞堂
  • 김오윤 기자
  • 승인 2015.08.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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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12 - 한국의 名家 12/14
▲ 고상가옥 구조의 상주 양진당
▲ 한재 터·울건축 김석환 대표

[나무신문 | 한재 터·울건축 김석환 대표] 입지와 배치

보물 제 1568호인 상주 양진당은 경북 상주시 낙동면 양진당길 27-4(승곡리)번지에 위치한 조선시대 전통가옥이다. 상주는 본래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사벌국이 있던 곳으로, 사벌국은 사량벌국(沙梁伐國)이라고도 했는데 일찍이 신라에 복속해 있었으나 3세기 중엽 신라 첨해이사금 때 백제로 기울자 우로(于老)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해 멸망시킨 뒤 사벌주(沙伐州)로 삼았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신라의 행정편제가 갖추어지지 못한 6세기 이전에는 사벌군(沙伐郡)으로도 나온다. 6세기에는 군사령관인 군주(軍主)가 파견돼 주둔하면서 신라가 죽령을 넘어 한강 중상류 유역으로 진출하는데 후방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통일 후인 687년(신문왕7)에 9주의 하나인 사벌주가 됐고, 경덕왕 때 상주(尙州)라 고쳤다.


상주는 백두대간의 동남쪽 경사지에 위치한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다. 서남부에는 멀리 백화산(933)이 있고 서북부에는 속리산(1058) 청화산(984), 조항산(951) 대야산(931), 희양산(999)으로 이어지는 고봉준령의 백두대간이 지나고 있다. 상주 서측에는 상주의 진산으로 석악(石嶽)이라고도 불리는 천봉산(435.8m)이 있는데 백두대간의 기운이 속리산에서 구봉산과 봉황산을 거쳐 그 산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천봉산 너머에 노악산(729m)이 자리 잡고 있고 동측에는 상산 삼악의 하나로 성주의 안산인 갑장산(805.7m)이 있으며 남측의 선산 좌측에 기양산(704), 선산 우측으로는 청하산(701)이 있다.


양진당의 뒷산은 식산(503)이며 들판 건너에는 삼봉산(440)이 있다. 그리고 양진당에서 서쪽 멀리 갑장산이 보인다. 양진당 앞에는 동쪽의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장천이 흐르고 있는데 낙동강의 명칭은 상주에서 비롯됐다.


양진당이 세워진 터는 지대가 낮은 편인데 그런 조건에서도 이 곳에 집을 지은 이유는 앞에 너른 들녘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양진당 앞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청원상주간 고소도로가 만나는 낙동분기점(JC)이 설치돼 있다. 전통가옥과 고속도로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차량이 없던 시절에는 사람이 살만한 곳들은 산 좋고 물 좋고 풍요로운 들녘이 갖춰진 곳일지언정 현대처럼 차로 쉽게 접근하는 사통팔달한 곳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 마루바닥으로 오르는 계단

연혁
이 건물은 조선 중기 문신 검간 조정(趙靖) 선생(1555~1636)의 고택으로서 1981년 해체 보수중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26년(인조4)에 착공해 3년의 공사로 1626년(인조6)에 준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목재는 대부분 안동에 있던 처가의 99칸 집을 옮겨와 사용했다. 상량문에는 순조 7년(1807)에 중수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대문채는 1966년 대홍수로 유실됐던 것을 2005년 발굴해 복원했다.


검간 조정 선생은 1565년(명종10)~1636년(인조14)까지 살았으며, 본관은 풍양 자는 안중 호는 검간이다. 아버지는 광헌이며 어머니는 홍운희의 딸이고 한강 정구의 문인이며 약봉 김극일의 사위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했고,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했으며,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경술(經術)과 문장에 뛰어 났고, 이조판서에 추증됐으며, 상주의 장천서원과 의선의 속수서원에 봉향됐다. 저서로는 검간 문집과 진사일록 등이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옛집을 정리하면서, 대종가로서의 제선청사(祭先廳事)와 부수적으로 친인척간의 친목 도모 및 독서당 기능을 위해 이 집을 짓게 됐다.

 

▲ 문간 및 행랑채 일우

특이한 가옥 구조와 양식
이 집은 전체적으로 ㄷ자 형태의 안채와 -자형의 대문채가 결합된 ㅁ자형 평면으로 돼 있다. 정면 9칸, 측면 2칸의 정침과 정면 측면 4칸의 좌우익랑채 그리고 정면 9칸 측면 1칸의 대문채가 덧대어 ㅁ자형 평면으로 돼 있다. 안채는 경사진 지형에 위치한, 소위 고상식(高床式) 건물로서 남방식 가옥의 특징을 띠고 있는데 건물을 땅에서 약 1m 정도 높여 지은 다락집 형태로 여름에는 지열의 영향을 덜 받고 하천이 범람할 경우 집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건물 높이가 높아서 규모가 웅장해 보인다. 하지만 고상식 주거에서는 보기 드문 구들을 설치한 점에서 조선시대 주거유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다. 방이 두 줄로 나열되는 겹집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도 특색이며 기둥은 굵은 부재를 사용하면서도 모서리를 접어서 투박하게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적 성숙도를 보이고 있어 학술과·예술적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된다.

▲ 전면

안채중 정침은 정면 9칸, 측면 2칸의 몸채는 좌측 두칸은 부엌, 그 다음 3칸은 방, 그 다음 3칸은 대청, 그 다음 한 칸은 방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정침 전면에 출입 동선을 위한 퇴칸을 두어 통로로 쓰고 있다. 건물 바닥은 안채 중앙과 정침의 좌측에 놓인, 양측 계단으로 오르도록 돼 있고 복도와 같은 긴 통로가 형성돼 있는데 루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조망을 얻을 수 있다.

▲ 서측면

우측 날개채는 앞 두칸이 대청 다음 한칸이 방 그 다음 한칸이 마루로 돼 있고 정침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두었으며 좌측 익랑채는 헛간과 방으로 돼 있고 부엌 상부에는 다락이 설치돼 있다. 그리고 전면의 문간채는 방과 방앗간, 창고, 중문, 마루로 구성돼 있다. 그 바깥채는 고상식이 아니며 나중에 중축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부분은 상대적으로 주거에 쓰이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평범한 구조를 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방을 두 줄로 배치한 겹집 구성과 구들을 설치한 점은 한겨울 외부의 차가운 공기의 영향을 덜 받도록 하는 북방식 구조의 특징이다.

 

이 집은 구조 양식상으로도 특이한 점이 많다. 정침 전면에 세운 6개 기둥은 통재를 사용했는데 하층부분에는 방형으로 치목하고 상부는 원형으로 다듬은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지붕은 정침의 툇마루 상부만 겹처마로 하고 나머지는 홑처마로 했는데, 겹처마로 된 서까래 부재도 특이하게 각형으로 가공돼 있다. 겹처마의 경우 일반적으로 원형 서까래에 방형 부연을 얹는데 비해 이 건물은 서까래를 네모지게 다듬어 부연과 같은 모습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 건물 측면 모서리는 귀틀 구조로 돼 꿸대가 밖으로 뻗쳐 나와 있다.

 

▲ 후면

이 집은 일반 구조로 돼 있는 전면 행랑채와 고상가옥 구조로 된 후면의 본채가 높낮이를 보이며 어우러져 독특한 멋과 맵시를 풍기고 있는데, 특이한 외관과 다소 복잡하면서 치밀한 내부 공간 구성 그리고 정성어린 조형사상을 읽게 하는 목조 수법들이 돋보이는 보기 드문 상류주택이다. 조선 중기 우리나라 가옥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