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은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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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신문
  • 승인 2015.07.2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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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 광희동~창신동~숭인동 일대
▲ 광희문.

조선시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한양도성(지금은 ‘서울 한양도성’이라고 부른다.) 동쪽 일대를 걷는다. 

‘서울 한양도성’ 4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동남방향에 있는 문)에서 출발해서 광희동 골목을 지나 신당역에서 동묘앞역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청계천을 건너는 다산교를 만난다. 다리를 건너 동묘앞역 6번 출구 가기 전에 화가 박수근이 살던 집터가 있다. 그 앞을 지나 동묘앞역에서 동묘 방향으로 걷는다. 동묘벼룩시장을 돌아보고 청계천으로 나가 영도교를 건너 다산교까지 간다. 그 길에서 청계천 빨래터를 재현해 놓은 곳을 볼 수 있다.

 

▲ 영도교에서 다산교 쪽으로 걷다보면 길 아래 청계천에 빨래터를 재현한 곳이 보인다. 능소화 오른쪽 물가가 그곳이다.

광희동 골목 사람들
광희문은 흥인지문에서 남쪽으로 약 800m 거리에 있다. 현재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은 광희문 안쪽에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로 치면 성 안에 있는 것이었으며, 신당역은 광희문 밖에 있으므로 성 밖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니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려서 광희문을 지나 신당역 방향으로 걷는 오늘 일정의 시작은 조선시대로 치면 성 안에서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 광희동 골목길. 하늘이 딱 골목길 만큼 열렸다.
▲ 광희동 골목길에서 본 간판에 있는 걷는 사람 형상.

조선시대에도 그랬을까? 광희문을 통과해 성 밖으로 나가서 골목길로 접어드니 성 안 골목길 풍경과 사뭇 다르다. 

택배오토바이가 서로 교차하기도 힘든 골목길이 길게 늘어진다. 하늘도 꼭 골목길만큼 열렸다. 

▲ 광희문 앞 광희동 골목길.

어깨를 맞댄 집은 서로 속내를 드러낸다. 수선집 옆 구멍가게, 그 옆 가내수공업일터, 정체 모를 사업장 앞 배달 자전거와 일반 주택의 철문은 오랫동안 세월을 나누어 가진 친구처럼 붉은 녹도 함께 슬었다. 

‘갤러리’, ‘목공소’라는 이름이 달린 건물 앞에 나와 있는 소박한 소품들은 골목 바람에 더위를 식히는 사람들을 닮았다. 

▲ 광희동 골목길에 서 본 박쥐 모형.

좁은 골목이 끝나면서 이어지는 풍경도 도심의 그것은 아니다. 푸른 대추나무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그 풍경이 눈에 들어와 그 앞으로 걷는다. ‘대추나무포차’라는 이름으로 밥도 팔고 술도 파는 식당이다. 

▲ 대추나무포차. 햇볕 가리는 차양을 뚫어 대추나무와 함께 살고 있다.

푸른 대추나무 잎사귀에 내 마음도 싱그러워져 식당으로 들어갔다. 김치찌개가 한 솥 끓고 있다. 백반에 나오는 국물이 김치찌개였다. 백반 한 끼에 5000원이란다. 밥 생각은 없고 김치찌개에 막걸리 한 잔 하고 싶었다. 밥하고 반찬은 없어도 되니까 김치찌개 한 그릇에 막걸리 한 병만 5000원에 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자신다. 

이 거래는 나에게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밥값 술값 반찬종류를 떠나서 식당에 앉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6대 임금인 단종이 삼촌인 세조에게 쫓겨나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자 그의 부인이었던 정순왕후 또한 서인으로 신분을 강등당하고 성 밖으로 쫓겨났는데 그 곳이 바로 이 부근이다. 

당시 정순왕후의 눈물을 나누고 마음을 어루만져줬던 사람들이 바로 이 부근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내 처지가 왕도 왕후도 아닌, 애초에 서민이니 강등당할 신분도 없지만 홀로 떠도는 산발의 여행객을 싫은 내색 없이 푸근하게 맞이해주는 이집 사람들의 마음에 내 마음도 푸근해진다. 

 

▲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고 빗물통에 씌여있다

화가 박수근의 골목
식탁 위에 쌓인 ‘달밥장부(인근 가내수공업 사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한 달 동안 밥을 먹고 일괄로 계산하기 위해 매일 적는 밥 장부)’를 보고 있으니 내 배도 부르다. 

배가 부르니 또 걷는다. 신당역에서 동묘앞역으로 가다보면 청계천 다산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동묘앞역 6번 출구 방향으로 가다보면 길 왼쪽에 빈대떡과 술을 파는 식당이 있는데 그 식당 오른쪽 벽 빗물통에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살던 집터를 알리는 글씨가 빗물통에 쓴 펜글씨였다. 작은 표지석에 글자를 새긴 것도 아니고, 잘 볼 수 있게 안내판을 붙여 만든 것도 아니고, 누군가 그냥 펜으로 쓴 것이다. 

어쩌면 그곳이 박수근이 살던 곳이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이곳이 박수근이 살던 곳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정성스레 손으로 써 놓은 저 글씨가 더 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구질하는 여인>, <빨래터>, <시장>, <귀가> 등 그의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민들이었다. 그가 살았던 이곳(창신동) 또한 청계천 옆 서민들이 살던 마을이고 지금도 변한 건 없다. 

 

빨래터를 바라보다
‘박수근 화백 사시던 집’이라는 글씨가 적힌 곳을 뒤로하고 걷는다. 동묘앞역을 지나 동묘앞에 도착했다. 이곳은 서민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하루를 보내는 동묘벼룩시장이다. 이 거리는 박수근의 붓에서 어떻게 살아날까? 

▲ 동묘벼룩시장.

벼룩시장 거리를 지나 다시 청계천으로 나선다. 영도교를 건너 우회전해서 걷는다. 오른쪽 아래로 청계천이 흐른다. 능수버들 낭창거리는 가지가 물 위로 드리운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거나 물가에 앉아 쉰다. 청계천에 있던 빨래터를 재현한 곳이다. 나는 능소화가 피어난 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다. 박수근의 작품 <빨래터>가 그 풍경에 겹쳐진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