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特需
한국전쟁 特需
  • 김오윤 기자
  • 승인 2015.07.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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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사)한국합판보드협회 - (일본 합판 100년사 중에서)

[나무신문 | (사)한국합판보드협회] 일본에서 목재수급에 대한 통제가 철폐되고, 민간무역으로 이행된 1950년 6월에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은 한국군과 북한군의 전투에 각각 유엔군과 중국군이 가세하여, 1953년 7월에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간 계속되었다.

유엔군의 중심은 미군이며, 또한 전투현장이 일본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주일 미군사령부 및 8군은 일본에 대하여 긴급조달물자를 대량으로 발주하였다. 이것이 한국 特需이였다.

 

한반도와 합판산업
한국 特需는 부흥과정에 있던 일본경제에 큰 영향을 주어 고도성장기로 넘어가는  역할 뿐만 아니라 합판산업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이 한국 특수는 미국의 진주군 특수와 아울러 1950년 이후 합판수출의 황금기를 맞이한 토대가 된 것이다.

조달물자로서는 섬유(면포, 모포, 마대), 트럭, 철강, 철조망, 휴대식료 등의 전선용 물자, 막사 등의 건설자재, 또한 서비스 특수로서 차량, 기계수리, 자재운송 등이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섬유, 기계, 금속, 목재 등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1951년도의 일본 경제백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特需는 일본의 지리적 사정도 도움이 되어 당초에는 상당한 규모로 발주되었고, 그 후에는 한국전쟁 전황의 일진일퇴에 따라 발주 규모나 품목이 변동되었으나, 통산해서 금년 6월17일 현재의 발주누적액은 3억 1500만 달러에 달하고 있어 (중략) 국내의 경제활동과 국제수지 면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特需 품목의 내용은 섬유, 기계, 금속, 목재가 중심으로서 이를 합하면 상품 발주액의 83%를 차지하고 있다.’

목재로서는 합판, 항공기용 합판 이외에도 전신주, 杭木(항목), 갱목, 갑판용재, 식당, 화물받침판, 나무통, 급수관, 텐트마루, 조립주택, 연료용, 교량용, 나무상자, 파이버보드 등 여러 가지 품목과 종류가 있었다. 또한 양적으로도 많아서 1950년 7월부터 1951년 8월까지의 계약량은 80만㎥에 달했다.

그밖에도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중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오키나와 쪽으로의 공급도 증가하였으며, 또한 운송선박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긴급선박증강대책’을 결정하여 목조 선박의 조선을 확대하였다.

합판에 대해서는 1950년에 352만㎥(생산량 대비 9%), 1951년에 420만㎡(7%), 1952년에 467만㎡(6%)에 달하는 대량의 발주가 있었다. 이와 함께 합판 생산량도 1946년의 1,653만㎡에서, 1949년에 3,727만㎡, 1952년에는 7,303만㎡로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1953년 7월에 한국전쟁이 종결하면서 특수 발주가 적어지고, 납입검사가 엄격해지면서 합판업계로서의 매력이 떨어져 그 당시 호조를 보이기 시작하였던 수출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노다(野田)합판의 사장이었던 노다(野田力三)씨는 「긴급 특수 합판납입의 기억」이라는 글 중에 한국 특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한국으로 보내는 포장용 합판의 납기가 너무나 촉박하였기 때문에 (중략) 전량 인수가 가능한 것은 우리 회사뿐이었으며 가격면에서도 우리 회사에 낙찰되자마자 생산에 들어갔다. 그러나 생산은 가능하였지만, 차량 40대분을 열흘 동안에 화물 발송하는 것이 도저히 무리라고 동업계에서도 뒷얘기가 나올 만큼 힘든 일이었다. (중략)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포장용 합판은 한국 전쟁터에 헬리콥터로 직접 투하하는 긴급물자의 포장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한국 특수는 일본경제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회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무역액은 1949년에 수출 5억불, 수입 9억불로서 4억불 적자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이에 대하여 1952년에는 수출 13억불, 수입 20억불로서 적자는 7억불이었지만, 이 밖에 한국 특수에 의한 재정 수입으로 8억불이 있었다. 이와 같이 수출이 증가한 것은 한국전쟁에 따른 세계경제의 회복에 의한 것이며, 게다가 특수로 얻어진 달러화 수입 증가가 그 후의 일본경제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것이다.

 

요소계 접착제의 보급
한국 特需에 앞서 미국 진주군 特需가 있긴 했지만, 도지 라인(Dodge line, 미국의 은행가 J. Dodge가 1949년에 내건 일련의 일본경제 재건책. 이는 당시 요시다(吉田) 내각 경제정책의 주요 골자가 되었음)에 의해 고통을 겪었던 일본 합판산업에 있어서 한국 특수는 전후의 부흥을 이루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보면 판매수입 증가로 경영기반이 안정되었고, 그것이 열압기, 건조기 등 설비 근대화를 가져왔으며, 또한 미군의 높은 품질 요구가 요소계 접착제를 보급시키게 되었으며, 나아가 기술혁신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시에 이 때부터 재개된 남양재 수입이 확대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위 내용은 「일본 합판 100년사」(2008년 일본합판공업조합연합회 발행)의 제6장 戰後 재출발의 기반확립과 特需, 5. 進駐軍 特需와 朝鮮 特需 중에서 5-3 조선 特需(152~155쪽) 부분을 번역한 것임. (조선 特需는 한국전쟁 特需로 수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