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첨당 보물 411호
무첨당 보물 411호
  • 김오윤 기자
  • 승인 2015.06.26 1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4 - 한국의 名家 4/14
▲ 사랑채 전경

[나무신문 | 한재 터·울건축 김석환 대표] 새로운 종가의 입지에 세운 집

▲ 한재 터·울건축 김석환 대표

양동마을에 있는 이 집은 1460년경에 지은 여강(驪江) 이씨(李氏)의 종갓집으로 이번(李蕃)이 서백당에서 독립해 지은 ‘안채’와 후에 지은 ‘사랑채’ 및 ‘사당’으로 구성돼 있다.

 

이 집을 창건한 찬성공(贊成公) 이번(李蕃)은 이광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던 성균관 생원이었는데, 손소의 7남매 가운데 장녀와 혼인해 영일(迎日)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처가살이를 하면서 이언적 등의 자녀들을 얻었으며, 후에 분가해 이 집을 지었다. 그 후 양동마을은 이번(李蕃)의 아들로 동방5현의 한 분인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이 배출되면서 손씨,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씨족마을이 형성됐다.


무첨당은 물자 형국을 이루는 양동마을 전체 지형에서 세 번째 획에 해당하는 물봉 능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마을의 안대인 성주산과의 관계로 보면 서백당보다 훨씬 활달한 경관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골짜기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전면 폭이 넓어져서 시야가 시원스럽고 완만한 뒷동산이 평온한 기운을 발해 집터로서 좋은 기운이 감돈다. 처음 지을 때는 소박했지만 사랑채와 사당이 갖춰진 현재의 모습은 양동마을 내 가장 영향력 있는 이씨 종가로서 위풍당당한 풍모를 풍기고 있다.


무첨당 앞을 에둘러 지나는 길에서 보면 이 집을 두른 담장이 높다란 지형 위에 올려다 보이고 이 집으로 오르는 계단이 사다리처럼 곧추서 있다 그리고 다시 안채와 사랑채 사이로 높다랗게 오른 높은 지대에 사당이 세워져 있는데 그 사당 앞에서 바라보면 이 집 터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거기서 보면 성주산의 경관이 아주 훤칠하게 바라보여서 당시 새 집터를 물색하던 주인의 안목을 느낄 수 있다. 이번은 이 터를 발견하고 매우 만족했을 것 같다.

 

▲ 사랑채 대청에서 밖을 바라봄

배치와 연혁 

무첨당(無添堂)은 원래 종가 좌측에 있는 별당을 지칭했는데 지금은 집 전체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건물은 외재 이언적을 봉사(奉祀)하기 위한 건물로 쓰이기도 해 일명 봉사청(奉祀廳)이라고도 불리어지는데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이란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으로 이언적 선생의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의 호(號)를 딴 것이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의 건축적 격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안채는 치목이 검박한 반면 사랑채는 화려해 보이며 규모와 품격, 부재의 품질과 치목 등 모든 면에서 수준 높게 돼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한 부지 내에 여러 건물을 지을 때 서로 평행하게 배치하는 것과 달리 여기서는 추가로 지은 사랑채가 기존의 안채 축과 어긋나게 돼 더 독립적으로 보이는데, 사랑채를 그렇게 한 것은 대지상황을 고려한 결과로 여겨진다. 즉 안채와 나란하게 배치하면 건물이 지금보다 앞으로 많이 나와야 하고 그리되면 마당이 아주 비좁아지게 되는데, 방향을 튼 덕분에 넓은 마당을 얻게 되고 진입시 안채가 가로막히지 않게 됐다.

 

▲ 안채와 사랑채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사당

무첨당의 구조

이 집을 들어설 때 독립적으로 보이는 사랑채는 몸채와 날개채의 ㄱ자 구조로 돼 있는데, 몸채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6칸 대청을 두고 꺾임 부분에는 방이 꾸며져 있다. 그리고 날개채 전면은 2칸 누마루로 돼 있어 몸채로부터 독립적인 공간감이 느껴지는데, 그 누마루의 동쪽과 남쪽에는 툇마루를 두르고 계자각 난간을 설치했으며 대청 우측 온돌방 옆에는 앞뒤로 마루를 들인 서고를 마련했다.

 

무첨당의 기단은 2단 막돌 허튼층 쌓기로 하고 자연석 주초를 사용했는데, 돌출된 누마루는 기둥을 지면까지 내려 2층처럼 들춰져 보이게 했다. 기둥은 배흘림이 돼 있는 원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굴도리를 올렸는데, 온돌방의 모서리와 대청쪽 창호를 설치하는 곳에는 네모기둥을 사용했으며 대청쪽은 무고주 5량가로 하고 누마루 쪽은 3량으로 돼 있다.

 

기둥 머리에는 초익공으로 꾸몄는데, 익공의 너비와 높이의 차이가 크지 않아서 초기적 수법으로 보인다. 그리고 포대공도 파련조각으로 장식돼 있다. 지붕은 홑처마에 몸채쪽은 맞배지붕으로 하고 누마루 쪽만 팔작지붕으로 했으며 몸채 우측의 돌출부는 부섭지붕을 달았다.

 

무첨당은 조선중기에 건립된 별당형 건물로 다른 별당들에 비해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다. 특히 한쪽에 놓여 있는 누마루는 조선중기 사대부 가옥 내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정자가 별당과 결합된 형태로 나타난 사례로 보이며 이는 사대부 가옥의 사랑채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안채는 이번이 분가해 살았던 단출한 살림집의 체취가 배어 있는데, ㄷ자형 몸채와 그 앞에 놓인 一자형 행랑채가 전체적으로 ㅁ자집 구조를 이루고 있다. 몸채에는 우측 모서리에 부엌을 두고 그 좌측에 안방, 대청, 고방이 꾸며져 있으며 좌측 익랑 부분에는 사랑방과 바랑마루를 두고 우측 익랑부분은 헛간과 방으로 돼 있다. 그리고 전면에 놓인 행랑채는 마루방과 헛간, 곳간으로 구성돼 있다. 안채의 구조는 지형에 맞춰 위쪽 본채와 익랑 바닥에 레벨 차이를 두고 그에 따라 막돌 허튼층 쌓기로 기단을 만든 다음 자연석 주초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에 포대공을 세운 무고주 3량가로 돼 있다. 그리고 지붕은 안채와 행랑채가 모두 단출한 맞배지붕으로 했다.

 

▲ 사당에서 바라본 성주봉

무첨당의 건축적 의의 

무첨당은 집을 처음 지을 때부터 점차 늘려나가는 과정에 따른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창건을 한 이번의 살림 형편과 그 아들인 회재 선생의 사회적 위상에 따른 변모의 의미를 살펴 볼 수 있다. 기존의 안채는 좌측 익랑에 사랑채를 두어 그 자체가 양반가옥으로서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지만 자손이 번성하고 그 가문의 위상이 높아진 후에는 걸맞지 못한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무첨당은 그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증설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가옥의 구조와 격도 차이를 띠고 있다. 또한 집 뒤의 사당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회재의 위상을 크게 드러내고 있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