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 獨樂堂 - 보물 제 413호
독락당 獨樂堂 - 보물 제 413호
  • 김오윤 기자
  • 승인 2015.06.18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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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 탐방 2 - 한국의 名家 2/14
▲ 독락당 계울측 측면 전경
▲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나무신문 | 한재 터·울건축 김석환 대표] 회재 이언적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 1553)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과 함께 조선의 5현(동방오현)으로 추앙받는 인물로, 독락당(獨樂堂)은 수양처이자 학문의 산실로서의 그의 채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그의 처음 이름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해서 언적(彦迪)이 됐다.

 

그는 23세 되던 계유년(151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 관직에 나가 사간원 근무를 시작으로 탄탄대로를 걷다가, 권신이었던 김안로에게 미음을 사서 파직을 당하고 독락당으로 낙향하게 된다. 낙향 후에는 독락당에서 자연을 벗 삼아 자신을 연마하며 학문적 도약을 이뤘으며, 이후 중종 32년 김안로가 사사됨과 동시에 재기용되고, 학식을 인정받아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양재역벽서사사건에 연루돼 유배를 가게 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사후 1572년(선조5)에 경주부윤 이제민과 유림의 공의로 회재 이언적의 덕행과 학문을 기릴 서원자리가 정해지고, 다음해인 1573년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와 안강읍 옥산리 7번지에 창건된 옥산서원에 배향됐다.

 

입지와 연혁

독락당은 서쪽을 지나는 낙동정맥과 안강들 서쪽 산세의 계류가 어우러진 산자수명한 곳으로 옥류를 끼고 등심대,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및 세심대 등의 반석이 있어서 옥산서원으로 연결되고, 그 계곡을 둘러싼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및 도덕산 등과 더불어 사산오대의 경승을 이루는 곳이다.

 

회재가 이곳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찍이 아버지 번을 따라 옥산 정혜사에 들리면서 양동과 가까운 곳에 옥산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계정 양진암은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초옥을 지었던 곳이다. 그리고  삶의 반려가 된 석씨 부인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회재는 고요한 자연의 품안에서 수양에 정진할 뜻을 품고 있었고 이곳은 그러한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진리의 근원이란 고요한 곳에서 찾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대로 도학자로서 뜻을 굳게 갖고 있던 회재는 낙향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며 이곳을 수양처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30세에 지은 입잠(入箴)의 일부를 보면 ‘나는 하늘을 본받아 그 덕(德)을 새롭게 하련다. 구습(舊習)을 씻어버리고 성법(聖法)을 한결 따라서 경망함을 바로잡고 태만함을 일깨워 남이 하나로서 되거든 나는 백을 해서라도 진실을 쌓고 노력을 계속해 기어이 성인(聖人)의 지경에 들어가련다” 라고 쓰여 있다. 

 

▲ 독락당 계정

독락의 삶을 위한 건축적 창작

회재는 낙향한 다음 해에 사랑채인 독락당을 지었다. 원래 이 가옥은 안채에 사랑채가 모두 갖춰져 있었는데 독립된 건물로 새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3년 후에 계정을 추가로 지으면서 개울 가까이 조용하고 독립적인 영역의 산책과 사색의 공간을 완성했다.

 

양반가옥에서 그러한 독립된 영역을 갖추려 했던 것은 당시 사회의 문화적 기류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사랑채는 선비가 속세를 벗어나듯 살림살이에 얽매이지 않고 학문을 도야하는 수양처로서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살림집이면서도 심산유곡에 홀로 놓인 것과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그래서 살림 공간으로부터 벗어남 없이 자연 정취가 베어나는 곳에서 학문에 전념하기에 안성맞춤인 환경이었다.


독락당은 주인이 지향한 삶에 알맞게 구조를 갖춘 집이다. 회재가 낙향하면서 사랑채를 새로 지은 것은 지향한 삶에 알맞은 환경을 먼저 가다듬었다고 볼 수 있다. 외부로부터 낮고 잘 드러나지 않게 조성한 것은 외부 사람들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을 이룩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회재는 평소 꿈꾸던 대로 이곳에서 자연을 벗하며 학문하는 새로운 생활을 영위했고 그것을 즐거움으로 여겨 건물 이름도 독락당이라고 했다. 그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주자의 무이구곡이었을 것이다. 주자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에서 주자의 호인 회암을 본떠 자신의 호를 회재(晦齋)라 했을 만큼 그는 주자의 삶을 흠모했다.

▲ 독락당 안채 전경(숨방채 수리중)

성리학자로서 회재는 특히 태극에서 도의 원리를 찾고자 했으며, 그가 저술한 태극도설은 그러한 그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태극은 만물과 음양의 변화가 함축돼 있다.


그리고 음과 양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독락당에서는 태극 원리가 느껴진다. 사계절의 변화 어둠과 밝음으로의 변화와 조화 등이 함축돼 있다. 그리고 내밀한 가옥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로부터 밖으로 열린 계정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공간 구성이 돼 있다. 이 집의 덕목은 어두움으로부터 종국에 활짝 열린 것이다.

 

도학적 풍모가 서린 정취 

독락당은 한국에서 가장 특이하고 빼어난 집이다. 독락당은 수려한 자연에 의해 항시 그윽한 아취가 베어나고 주변의 계곡과 산천은 독락당과의 관계에 의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개울은 여느 곳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언덕에 걸쳐 앉은 계정이 있음으로써 주변 일대가 도학적 풍취를 띠게 된다. 그리고 그처럼 건축과 자연의 상호 관계 속에서 하나의 건축적 완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기품 있는 격과 관조의 분위기를 띤다.

 

독락당의 건축적 성격과 분위기는 방문객의 눈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만력(萬曆) 43년 을묘년 8월1일 하곡 안우길이 회재 사후 그의 손자인 청도군수를 지낸  이준(1540~1623)이 살던 독락당을 방문해, 쓴 기문을 보면, 회재 선생이 독락당을 경영한 뜻이 배어난다.

 

▲ 독랑당 사랑채 전경

그는 글에서 “…그러나 이 사이의 산수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풍취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고 묻는다면, 나는 설명할 말이 있다. 『논어』에서 이르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조용히 있다’ 했다. 물의 성질은 흘러서 고여 있지 않고, 산의 성질은 중후해 위치를 옮기지 않는데, 흘러서 고여 있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니겠으며, 중후해 위치를 옮기지 않는 것은 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선생께서 이곳의 산수를 좋아하신 것이다. 이 점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알지 못하는 바이고, 선생만이 혼자서 즐기신 풍취였던 것이다. 따라서 선생의 한번 움직임과 한 번 조용히 있음은 모두 이곳에 흥취를 깃들여서 이 사이에서 홀로 즐거워하는 풍취를 지니지 않는 것이 없었다”

 

도학적 삶을 지향한 선비의 거처로서 체취를 간직하고 있는 독락당은 회재의 생애와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 시대 문화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독락당은 정신과 건축적 창작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건축적 기품과 멋을 지닌 특별한 곳이다.

 

▲ 사랑채 옆 개울로 트인 담장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