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인용 밥상
4인용 밥상
  • 나무신문
  • 승인 2015.06.1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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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경기도 화성 용주사
▲ 용주사 범종. 국보 제120호다.

일요일 저녁에 밥 먹기
‘불금’은 ‘불금’이기 전에도 ‘불금’이었다. ‘불금’의 이름 없는 형제 자매들도 있었으니 이름이 붙지 않은 그 모든 ‘불금’의 날들이 요즘도 횡행한다. 지나간 그 모든 날들에게 안부를 묻는 자리가 일요일 저녁 밥상이었다. 

온 가족이 머리를 맞대고 밥상 앞에 앉는다. 닭고기로 볶음탕을 하고 어제 먹다 남은 보쌈을 상에 올리고 고향에서 보내온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와 밑반찬 몇 가지를 놓으니 밥상이 가득 찬다. 

밥 한 술 크게 뜨고 닭다리를 뜯는 둘째는 밥상머리 어린 나를 닮았고, 보쌈에 겉절이 얹어 오물조물 먹는 큰 애는 아마도 제 엄마 어릴 때와 같으리라. 반찬 하나 찌개 한 술에도 할 말이 왜 이렇게 많은 지... 

아이들은 찌개가 맛있느니, 닭볶음탕이 매운데 계속 들어간다느니, 집사람은 천천히 먹으라는 말로 거들고, 나는 이 김치가 할머니집에 가서 온 가족이 담근 김장김치인데 아직도 이렇게 맛있다며 무말랭이와 콩자반도 먹어보라고 떠들어 댄다. 

내일이면 또 서로의 시간으로 흩어진다. 이렇게 다시 모여 콩자반 하나에도 이야기를 얹을 수 있는 일요일 저녁을 기다려야 한다.

 

▲ 용주사 입구.

정조와 사도세자
일요일 저녁 밥상을 물리고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떠드는 소리를 배경으로 글의 주제를 잡는다. ‘가족’이라는 단어 하나가 실마리 없이 거실을 떠돈다. 천장에 풍선처럼 매달린 단어 하나 ‘가족’에서 최근 다녀온 경기도 화성 용주사가 생각났다. 

용주사는 조선시대 정조 임금이 아버지를 위해 지은 절이다. 정조의 아버지가 사도세자다.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들은 뒤 절을 지을 것을 결심한다. 뒤주에 갇혀 죽은 아버지의 넋을 위로했던 지난 모든 생이 용주사 창건으로 이어진 것이다. 
경기도 양주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융릉(사도세자의 능)으로 옮기면서 용주사도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1790년 용주사를 세운 정조의 꿈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이름을 ‘용주사’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용주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향교 등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우는데 절 입구에 홍살문을 세운 이유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원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16년(854년)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절이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가 정조가 절을 다시 지은 것이다.  

▲ 용주사.

절이 크지 않다. 대웅보전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인 천보루를 지난다. 눈에 보이는 절집이나 탑, 종, 나무와 꽃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국보 120호로 지정된 용주사 범종의 제작 연대가 신라시대 문성왕16년(854년)이라는 설과 신라시대 동종 양식을 기초로 고려 초에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는 친절한 안내판의 설명 보다 지금 나처럼 해질녘 공중으로 울려퍼지는 저 종소리(국보로 지정된 종은 지금은 치지 않고 새로 만든 종을 친다.)를 들으며 정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헤아려 보는 일이 본능처럼 나를 따른다.  

 

승무
엉겅퀴꽃과 작약이 핀 절 뒷마당까지 찾아온 종소리를 따라 걷는다. 절 밖으로 나가는 길, 글씨를 새긴 돌멩이들이 배웅한다. 그중 비석이 하나 눈에 띈다. 조지훈 시인의 <승무>가 새겨진 시비다.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승무>라는 유명한 시를 지은 조지훈 시인도 이곳을 찾았었나 보다. 시비 뒤에 ‘1938년 조지훈 시인은 용주사를 찾아 승무를 보고 영감을 얻어 시 <승무>를 짓는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승무>에 나오는 것처럼 ‘오동잎 잎새마다 지는 달빛’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절에 오동나무는 없었다. 지나가는 스님에게 예전에 절에 오동나무가 있었는지, 아니면 오동나무가 있었던 것을 아는 스님이 계시는지 물어봤는데 다 모른단다. 다만 가을에 ‘승무제’를 하니까 그때 구경 오라시며 합장하고 돌아선다.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 조지훈 시인이 보았던 승무를 보고 달빛은 어느 나무의 잎새에 어느 풀꽃의 꽃잎에 지는 지도 한 번 봐야 겠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효심 가득한 곳에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서러운 그 인연은 또 무슨 상관일까? 글을 마치며 사족 하나 단다.   

 

<4인용 밥상>

일요일 저녁 가족 밥상은 만석이다.

4인용 밥상에 4명이 앉으면
고향에 계신 아버지 엄마 형님도
다 밥상에 모인 것 같아
된장찌개 한 숟가락에도 할머니 얘기가 담기고
콩자반 한 톨에 할아버지 청년시절 얘기가 오른다.

애들 커서 가족이 생기면 4인용 밥상 받아놓고
내 얘기 집사람 얘기 어떻게 할지는 몰라도
일요일 저녁에 콩자반 한 톨 된장찌개 한 숟가락 나누며
이야기하는 밥상이라면 됐다.

4인용 밥상이 만석이면.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