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진 줄 알면서도 떠났다. 꽃이 져야 열매 맺는 이치야 오래 전에 알았지만 꽃 떠나보내는 시절은 늘 소설 같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바뀌는 잎사귀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지나야 봄날은 간다.
기와집 다방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소재지에 도착했다. 하늘이 파랗고 공기는 투명했으니 햇살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생명에게 여과 없이 흡수됐다.
식당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기와집 지붕에 매달린 십자가를 봤다. 돌담 안 기와집이 교회다. 다른 골목에서 찾은 건 기와집 다방이었다. 이곳은 교회도 다방도 다 기와집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시골 다방에 으레 있을 법한 주황색 소파 대신, 짙은 갈색과 검은색 소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인으로 보이는 아줌마와 마을 아줌마 세 명이 소쿠리에 담긴 튀밥을 집어 먹는데 불청객인 내가 들어간 것이다.
아줌마들은 연신 튀밥을 먹으면서 ‘어디서 왔냐’, ‘뭐하러 왔냐’, ‘사진기가 크다’, ‘그런 건 뭐하러 찍냐’ 묻는다. 나는 아줌마들을 보지 않고 사진을 찍으며 ‘서울에서 왔고, 사진 찍으러 왔고, 보통 사진기 이고, 시골 다방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아줌마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나는 아무런 말없이 사진을 더 찍었다. 차 한 잔 하고 싶었으나 일행이 있어 그냥 나왔다.
다방 바로 앞 면사무소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를 타러 가는데 건물 옆에 비석 하나가 보인다. ‘소초면독립만세기념비’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 중 일부는 일본군이 쏜 총에 맞아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기도 하고, 살점이 찢기는 고문과 태형을 당하기도 했다.
역사의 무게를 버티기 위해서인지 소초면독립만세운동의 내용을 새긴 비석은 산 모양을 하고 앉아있었다.
달 뜨는 항구
해질 무렵 도착한 곳은 연곡해변이다. 하룻밤 묵을 숙소를 찾는데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해서 주문진항 근처 모텔을 잡기로 했다.
연곡해변에서 주문진으로 가는 도중에도 바닷가 바로 앞에 민박, 펜션 등의 이름이 적힌 숙소가 여러 개 있었으나 그곳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중간에 차를 멈춘 곳이 영진항 근처였다. 마침 수평선 위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바닷가 건물의 불빛, 오가는 자동차 불빛과 대조적으로 달은 저 먼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난다. 그 모습이 좋았다.
주문진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어둠이 완전히 내린 항구로 나갔다. 달빛은 은은했다. 항구 한쪽에 얌전하게 정박한 두 척의 배 위로 달빛이 내린다. 육지에서 바다로 쏟아지는 물소리, 자동차 소리, 사람 소리에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달빛이 소리를 흡수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밤바다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그랬듯 삼겹살집에서 고기를 구우며 소주잔을 비웠다. 예전 같지 않은 건강 얘기, 자꾸만 덜컹 거리는 낡은 카메라 얘기,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오는 사랑 이야기 등을 빈 소주잔에 채웠다.
800살 은행나무 앞에 피어난 민들레
햇살에 안개가 흩어지기 전에 연곡해변 솔숲길을 걸어야한다고 다짐했지만 눈을 뜨니 밖이 환하다.
은파금파 바다가 눈부시다. 바닷가 모래밭에 앉았다. 그곳에는 나와 일행 두 명 뿐이었는데 일행이 먼저 자리를 뜨는 바람에 바다 앞에 나 혼자 남았다.
언젠가 누군가 내게 바다는 그리움이라고 했는데 나는 바다가 그리워질 때까지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냥 그 생각이 났고 그저 어젯밤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아직도 코끝에서 술 냄새가 퍼지고 햇살 담은 바람이 바다에서 내게로 불어오는 것만 좋았다. 거기에 누웠다.
연곡해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장덕리는 복숭아마을이다. 사실 장덕리 복사꽃밭에서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일행과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늦게 찾아왔다. 꽃 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보름달 뜬 복사꽃밭 분홍은빛 팽팽한 조율의 긴장감을 이십대 초반에 경험했던 터라 올해는 그 청춘의 맛이 어떻게 익었는지 알고 싶었다. 계절로 치면 삼복더위 한 여름을 지난 나이인데 아직도 봄 같으니, 그 청춘이 익기는 익었을까?
장덕리 800살 은행나무 그늘이 좋아 뒹굴다가 쓰러져 누운 민들레꽃 앞에서 멈췄다. “너도 어제 술 먹었냐?”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