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으로 들어온 고래
골목으로 들어온 고래
  • 김오윤 기자
  • 승인 2015.04.2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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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신화마을
▲ 장태동

울산은 멀다. 작정하고 나선 길인데도 지루하다. 게다가 사나흘 찌푸린 하늘 탓에 마음도 무겁다. 일기예보는 내일부터 점차 구름이 벗겨질 것이라고 하는 데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울산은 4시간40분 만에 도착한 나를 흩뿌리는 이슬비로 맞이한다. 

 

울산의 첫 날
울산대공원을 어슬렁거렸으나 감흥이 없다. 오래 전부터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게 익숙한 듯 보였다. 날씨를 탓하며 눈에 거슬리는 것을 흘깃거릴 마음도 일지 않았다. 
낮은 먹구름은 일몰 보다 일찍 어둠을 만들었다. 전조등을 켠 자동차들이 신경질적으로 교차하는 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고래가 있는 벽화.

내일 날이 개면 신화마을을 가기로 하고 오늘은 흐린 날씨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몇몇 술집을 기웃거리다가 보쌈집으로 들어섰다. 든든한 저녁 꺼리와 함께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을 찾은 것이다. 

일반보쌈과 마늘보쌈 두 종류다. 마늘보쌈을 시켰다. 돼지고기 수육 위에 마늘 다진 것을 수북하게 얹었다. 먼저 마늘만 먹어봤다. 맵지 않고 달다. 생마늘은 아닌데 찌거나 볶은 것도 아니다. 알고보니 마늘에 열을 가하지 않고 숙성시켰단다. 

일하는 아줌마가 울산지역 소주인 ‘좋은데이’를 가장 먼저 언급하며 “뭘로 드릴까요?” 하신다. “좋은데이요”

그러고 보니 5시가 갓 넘은 시간에 식탁 세 개만 비었다. 5시에 문을 여는 집인데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몰려온 모양이다. 

웃는 소리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벌써부터 농익었다. 식탁 앞에 혼자 앉은 나는 천천히 소주 잔을 기울였다. 술잔에 나만의 시간을 꾹꾹 눌러 담고 천천히 마셨다. 그러는 사이 식당 문 밖에는 안으로 들어와서 식탁을 꿰차고 앉을 기회를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다. 

한 병 더 시키고 남은 수육을 다 먹고 싶은 마음을 접고 일어섰다. 거리에 바람이 분다. 이 바람에 내일 아침에는 구름이 걷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신화마을 골목길은 나뭇가지처럼 퍼져있다. 사진 가운데 길이 중심 골목이다. 이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서 좌우로 골목이 났다

집단 이주촌, 신화마을
일기예보는 빗나갔고 울산에서 맞이한 두 번 째 아침은 변비 걸린 아랫배처럼 묵직했다. 시간이 지나면 파란 하늘이 보일 것 같은 막연한 기대에 최대한 일정을 늦추었지만 날씨는 내 맘 같지 않았다. 신화마을은 그런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 마음이 따듯해지는 그림으로 나를 맞이했다.  

신화마을은 집단 이주촌이다. 1960년대 석유화학단지가 울산에 조성되면서 당시 매암동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이주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겼다. 마을 이름인 ‘신화(新和)’의 의미는 새롭게 정착한 마을에서 주민들이 화목하게 잘 살라는 것이란다. 

이주의 절차와 과정, 그리고 그 가운데 생겼을 법한 여러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 지 묻지 않기로 했다. 그저 다만 담장 위 빨랫줄에서 나부끼는 빨래며 낮은 지붕, 골목 구석에 나뒹구는 생활의 흔적들로 지금의 신화마을을 이해하기로 했다. 

 

▲ 신화마을 경로당 벽에 그린 그림.

고래가 춤추는 골목
낮은 언덕을 올라가며 빼곡하게 들어선 집과 골목을 돌아본다. 마을 가운데를 관통하는 중심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좌우로 골목이 열린다. 각 골목에는 주제가 정해져 있고 그 주제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신화의 골목, 고래의 골목, 작가의 골목, 채색의 골목, 암각화의 골목, 꽃의 골목, 동화의 골목, 대화의 골목, 착시의 골목, 음악의 골목, 영화 <고래를 찾는 자전거> 촬영 골목, 꿈꾸는 골목, 민화의 벽, 동심의 골목, 세계명화의 골목, 한국명화의 골목 등이 있다. 

자전거가 가는 길 위에 고래가 춤을 추듯 유영하는 그림이 낭만적이다. 울산의 유명 여행지인 반구대암각화의 그림을 흉내 낸 그림도 보인다. 창문 옆 벽에 고래 꼬리만 그려 넣은 그림도 있다.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고래의 조형물이 어느 집 옥상 난간에 있다. 바다를 닮은 파란 지붕이 눈 아래 보이고, 그 지붕은 더 먼 곳에서 어느 덧 걷힌 구름 사이로 드러난 파란 하늘과 이어진다. 파란 하늘 아래 공기 중에서 유영하는 고래의 그림은 희망을 말하는 듯하다. 경로당 벽 한 쪽 동화처럼 파란 벽화에서 고래와 소년이 우정을 나눈다. 

▲ 고래 꼬리가 있는 벽화.

동화 같은 벽화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현실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애써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골목을 걷고 있는데 ‘그럴 것 같다’는 나의 생각에 맞장구를 치는 시 한 편이 어느 집 담벼락에 적혀 있었다.       

 

고래잡이하던 이들 다 떠나고 / 남은 자들 얕은 숨소리 새어 나온다. // 고단한 몸 이끌고 불빛 따라 스며든 마을/위로의 손길인 냥 가로등만 반긴다. // 가고 없는 이들은 / 어느 하늘 아래서 단꿈을/꾸는 것일까 // 어깨동무 깨동무 보고 싶은 건 // 점방에서 마시는 소주 한 잔 만큼이나 쓸쓸하다. - <신화마을 벽에 쓴 김재승의 시 내 고향 신화마을>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