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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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신문
  • 승인 2015.04.0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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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 정릉시장 옆 정릉천 옆길에 있는 그림.

[나무신문] 남쪽에서는 꽃잔치인데 북쪽에서는 꽃샘에 영하다. 양달에는 개나리가 노란데 응달에는 잔설이다. 마음 다부지게 먹고 길을 나서도 돌아오는 밤이 휑하다. 계절 참 수상하다. 이럴 때는 사람이 답이다. 

 

정릉시장 사람들 
전국 어디나 재래시장이 있다. 서울에도 각 구 마다 적어도 1개 쯤 재래시장이 있다. 북한산 자락 정릉동에는 정릉시장이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부인이자 조선 초대 퍼스트레이디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이 있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정릉이다. 

북한산 계곡물이 사람 사는 마을에 이르러 생활의 편린과 함께 뒤엉켜 고이며 흐르는 정릉천 주변에 정릉시장은 있다. 

1000원 짜리 국수 집 문 밖 테이블에 앉은 할아버지들 얼굴이 불콰하다. 햇살에 찡그린 주름이 깊다. 어물전 천막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에 매달린 북어대가리가 ‘봄가뭄’처럼 말랐다. 방앗간 앞 평상 위에는 들기름 참기름 미숫가루 고춧가루 누룩이 자연스럽게 놓였다. 

47년 됐다는 순대국밥집은 그 역사 보다 더 오래된 한옥이다. 그 집 앞 식당은 40년 동안 칼국수를 끓이고 있다. ‘이 정도는 끓여야 맛 내지 싶다’신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어 느티나무집이라는 상호를 달았다는 식당은 기껏해야 20여 년 정도 밖에 안 됐다. 

 

▲ 정릉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경국사가 나온다.

사는 사람 파는 사람 분주한 발걸음 옆으로 정릉천이 흐른다. 미역줄거리 같은 이끼들이 물살 따라 너울거린다. 도랑 옆 낡은 우레탄길은 창 넓은 모자에 마스크를 쓰고 열심히 팔을 흔들며 걷는 아줌마들의 헬스코스다. 간혹 동네 아저씨가 자전거를 끌고 지나가거나 유모차를 밀고 걷는 부부도 보인다. 

북극곰에게 생선을 파는 시장 아줌마, 호랑이에게 홍시를 파는 시장 사람을 그린 벽화가 정릉천변 한옥집 담벼락을 덮었다.  

정릉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암반바위가 드러난다. 도랑 옆 건물을 지우고 암반바위를 넓히거나 나무를 심어 보면 이곳도 그럴싸한 계곡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곳에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옆에 ‘손가정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 일대는 북한산 연봉 아래 위치한 계곡으로 경치가 좋아 사람들이 자주 찾던 곳이다. 이 주변에는 왕 씨와 손 씨가 많이 살았었는데 전망 좋은 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중 손 씨가 지은 정자를 ‘손가정’이라고 했고 ‘손가정터’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경국사 주지스님 
손가정터를 지나 좁은 골목으로 올라간다. 사람 두 명이 간신히 교차해서 지나갈 정도의 골목길 중간에 하늘로 솟구친 적송이 있다. 소나무를 베지 않고 집 터를 구획했으며 골목을 만들었다. 

골목을 빠져 나가면 다시 정릉천을 만난다. 물가에 난 길로 내려서서 물살을 거슬러 걷다보면 경국사라는 절이 나온다. 

절이 작다. 터가 넓지 않으니 절집도 작다. 작은 절집이 기와를 맞대고 앉았다. 처마 곡선에 하늘이 물고기 모양으로 재단된다. 

바람이 지나가면 물고기 추를 단 풍경이 흔들린다. 산신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서 풍경을 바라본다. 풍경에 매달린 양철 물고기가 먼 데 아파트 단지 하늘금 위에서 흔들린다. 풍경은 여기서 울리는데 흔들리는 건 저 먼 아파트 같다. 

경국사는 고려시대인 1310년 보명율사가 청암사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방치됐다가 명종에 이르러 중수하고 국가에 경사스러움이 끊이지 않게 기도를 올리라는 뜻에서 경국사로 이름을 바꿨다. 

날 저무는 경국사 뜰에서 스님을 만났다. 나는 절을 나서는 참이었고 스님은 방에서 나오던 참이었다. ‘안녕하세요’하니 스님이 합장하며 ‘안녕하세요’한다. 경국사는 언제 생겼냐고 물었을 뿐인데 스님은 나를 방으로 안내하더니 차를 끓인다. 

물이 끓는 사이 스님과 나는 시 두 편을 나누어 읽었다. 찻잔을 각자 앞에 두고 차를 마신다. 시 얘기는 하지 않고 차만 세 잔 마시고 나왔다. 절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 정릉시장으로 가는 길에 두 편의 시가 발길에 차인다.

 

▲ 정릉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경국사가 나온다.

주이마라
저녁 약속 장소는 주이마라였다. 정릉시장에서 택시 기본요금 정도라니 그리 멀지 않아서 걸어가려고 했는데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택시를 탔다. 주이마라는 국민대 정문 길 건너 1711번 시내버스 종점 마을에 있는 사천요리 전문점이다. 마라샹궈, 마오차이, 훠궈를 판다. 

마라샹궈는 뜻 그대로 해석하면 ‘얼얼하고(마) 맵고(라) 향이 나는(샹) 솥(궈)’이다. 큰 냄비에 야채 고기 해산물 고추 마라 등의 양념을 넣고 볶아 내는 요리다. 중국 사천 지방의 향이 요리에 그대로 묻어난다. 공기밥을 시켜서 식사로 먹어도 좋겠고 안주로도 제격이다. 중국 맛이니 술도 중국술이 어울린다. 사천 지방 술인 제갈량도 좋겠고, 흔한 연태고량주도 좋겠다. 

훠궈는 매운 육수인 홍탕과 담백한 육수인 백탕 두 종류에 채소 육류 해물 면 두부 등 다양한 재료를 넣어 먹는 중국 사천지방의 샤브샤브다. 팔각과 정향 등 중국 특유의 향신료 맛이 배어나와 특별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마오차이는 개인용 훠궈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요리가 다 완성되어 한 그릇에 담겨 나온다. 공기밥을 시켜서 함께 먹는 사람들이 많다. 술 좋아 하는 사람이면 이 또한 좋은 안주다. 

이 식당 이름이 ‘주이마라’다. ‘마라에 취하다’라는 뜻이 담겼다. 주인장이 사천에 가서 요리법을 배웠다. 만두나 햄 채소 고기 등은 국내에서 유통되는 것을 쓰지만 양념과 향신료 등 맛을 내는 재료는 사천에서 가져다 쓴다. 

정릉시장, 정릉천변 마을, 경국사, 국민대 앞 배나무골 주이마라, 수상한 봄날 나는 사람에 취하고 마라에 취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