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겨울밤에
깊어가는 겨울밤에
  • 나무신문
  • 승인 2015.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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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대한민국 전통주

엄동 한설에 화롯불 피워놓은 방이 아늑하다. 황소바람에 ‘훙훙’ 거리는 문풍지 칼바람도 소반 술상 하나에 녹는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불빛이 창으로 새어나면 창밖 골목길도 따듯해지겠지.


이강주
이강주를 제대로 알려면 한 잔 마시기 전에 향기부터 느껴야 한다. 도자기에서 흘러나오는 미황색 맑은 술이 도자기잔 바닥에 부딪치며 향을 먼저 퍼뜨린다. 향기에서 그윽한 휘발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다. 혀가 맛을 느끼기 전에 이미 입 안에 술 향이 퍼진다. 혀에 닿은 술이 부드럽다. 이어 입 곳곳을 ‘톡’ 쏘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잠들어 있는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이다. 술을 넘기고 나서 숨을 쉬면 술의 맛과 향이 코와 입 안에서 순환한다. 코 끝에 남아 있는 마지막 향은 잔잔한 호수에 은파금파 빛나는 햇볕의 산란을 닮았다. 이강주는 이렇게 느끼고 마셔야 한다. 이강주는 누룩을 빚어 전통소주를 내려 받는 증류방식으로 소주를 만들고 거기에 배와 생강, 계피, 울금 등 약재를 첨가해 맛을 완성한다. 마지막 단계에서 꿀이 첨가된다. 이강주와 어울리는 안주로 여러 사람들이 고기류, 견과류, 육포 등을 추천한다. 이강주는 소주지만 국물요리나 맛이 강한 양념이 들어간 음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국물이 자글자글하게 우러나는 소고기 불고기가 어울릴 것 같다. 맛과 향이 강한 양념이나 조미료를 넣지 않고 주 재료인 불고기용 소고기와 양파와 당근 파 등을 약간씩 썰어 넣고 심심하고 담백하게 맛을 내야 한다. 이와 함께 한과류나 떡 등으로 입맛을 다시는 것도 좋겠다.


소곡주
소곡주의 맛은 세 단계로 느껴야 한다. 처음에는 아카시아 꿀의 단맛, 그 다음에는 들국화의 쓴맛, 그리고 약간의 청량감과 함께 들꽃의 은은한 향이 느껴진다. 알코올 함량 18%의 소곡주를 한 모금 넘기면 부드러운 비단이 살갗에서 미끄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목에서 느낄 수 있다. 입안에 남는 향은 말린 들국화를 뜨거운 물에 우려낸 차의 맛 같다. 쌉쌀한 맛이 단맛 뒤에 이어지기 때문에 입안이 개운해지면서 침샘에서 침이 솟는다. 그와 함께 청량감이 입안에 퍼지기 때문에, 그 순간은 입안의 모든 잡냄새가 사라지고 오직 술 그 자체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알코올 함량 43%의 소곡주를 ‘불소곡주’라 한다. 불소곡주를 한 모금 마시면 처음에는 향과 맛이 없다. 술이 입안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혀와 입 전체를 자극하는 짜릿한 맛과 함께 입안에 청량감이 퍼진다. 정제 되지 않은, 거칠고 강한 맛과 향에 입과 코가 뻥 뚫리는 기분이다. 입을 다물고 코로 숨을 내쉬면 들국화의 향이 퍼진다. 알코올 함량 18%의 소곡주 안주는 전 종류가 잘 어울린다. 북어조림이나 두부조림 등 약간 매콤한 양념을 곁들인 담백한 안주 또한 괜찮으며 나물류를 함께 놓으면 구색이 맞는다. 알코올 함량 43%의 소곡주는 고기류를 안주로 곁들인다.


문배주
문배주에서 양지바른 산자락 들풀과 들꽃의 풋풋한 향이 강하다. 들판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나 질기게 살아가는 생명력이 술에서 느껴진다. 문배주의 첫 맛은 강하다. 강한 첫맛이 코와 입, 속까지 동시에 퍼진다. 청량감이 강해 혀가 아리다. 코에서 퍼지는 향 또한 자극 적이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데 불기둥이 내려가는 느낌이다. 이 모든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문배주의 진정한 맛은 그 다음 순간에 나온다. 한 여름 폭포수 같이 입안을 시원하게 만드는 첫 맛 뒤에 들풀의 향이 입안을 맴돈다. 술의 재료인 수수와 조의 향이 은근하게 퍼진다. 문배주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향을 문배의 향이라고 말한다. 문배란 산에서 자라는 돌배의 일종이다. 문배 특유의 향이 있겠지만,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고 산에서 스스로 자라 열매를 맺는 문배 또한 야생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문배주는 길들일 수 없는 야생의 성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들풀의 향, 문배의 향을 확인한 뒤에 문배주의 마지막 맛을 느낄 수 있다. 들풀과 들꽃의 향과 맛에 이어지는 마지막 맛은 ‘무(無)’다. 입안에 아무 맛도 남지 않는다. 술의 향은 몸속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데 입안에는 아무런 맛도 남지 않는다. 입안의 잡맛을 다 쓸어버린 뒤, 맑은 샘물 샘솟듯 침샘에서 맑은 침이 솟아난다.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정화의 상태에서 어린아이의 입맛을 갖게 된다. 이 순간은 어떠한 맛이라도 민감하게 느낄 것 같다. 고기류 또는 나물, 특히 더덕양념구이를 곁들어 먹으면 좋겠다. .


계룡백일주
계룡백일주는 가을 하늘과 땅의 향기를 품은 술이다. 계룡산 자락을 끼고 있는 공주에서 100일 동안 술을 빚는다고 해서 이름이 ‘계룡백일주’다. 계룡백일주의 봉인을 따고 병마개를 여는 순간 은은한 술 향이 방안가득 퍼진다. 작은 잔에 술을 따라 놓고 향기부터 느껴본다. 그 향이 대한민국의 휘발성 짙은 파란 가을하늘을 닮았다. 첫 모금에 입안에서 퍼지는 향이 봄 햇살 퍼진 언덕에 피어난 진달래 꽃잎처럼 부드럽다. 한 모금을 넘기고 난 뒤 코로 날숨을 내 쉬면 코끝이 약간 ‘찡’하면서 솔잎 향기가 여운처럼 남는다. 2~3초가 지난 뒤 입안에서는 서리를 맞고도 생명의 빛을 발산하는 국화의 강단진 향과 맛이 진하게 우러난다. 그 뒤를 따르는 맛은 국화의 쓴맛, 진달래의 풋풋한 맛, 솔잎의 알싸한 맛이 어우러져 한 가지 맛을 만들어 낸다. 계룡백일주의 향과 맛을 처음부터 끝까지 음미하려면 한 모금의 술을 입에 넣을 때부터 목으로 넘긴 뒤 향과 맛이 입안 곳곳에 골고루 퍼질 때까지 입을 열면 안 된다. 또한 첫 잔은 세 번에 나누어 마시면서 그 깊은 맛을 진정으로 우려서 보아야 한다. 안주는 육류가 어울린다. 생밤과 대추를 곁들이면 더 좋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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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