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보내는 방법
가을을 보내는 방법
  • 나무신문
  • 승인 201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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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 비오는 몇몇 골목들

 

▲ 비에 젖은 단풍잎 낙엽이 골목을 메웠다

겨울비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적중했다. 비 마중을 오전 댓바람에 했다. 가을 무가 달다는 옛말이 생각나서 동네 재래시장에 가서 무를 여섯 개 샀다. 하나에 600원이다. 돈이 좀 남아서 쪽파 한 단을 배낭에 넣었다. 깍두기는 그렇게 완성됐다.

두 평 거실에 깔린 바싹 마른 이불이 온기를 머금었다. 턱 높은 창 밖에는 대숲 바람 소리를 내며 빗줄기가 쏟아진다. 이대로 그냥 잠들어도 좋겠다는 유혹을 떨칠 수 있었던 건 이 비가 올 가을에 볼 수 있는 마지막 비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낙엽이 된 단풍잎이 기와지붕 물받이에 쌓였다

금요일, 11월의 마지막 금요일, 비 내리는 11월의 마지막 금요일, 2014년 가을을 배웅하는  대목에 이렇게 극적인 연출이 어디 있겠는가? 

 

단풍잎이 낙엽이 되어 비에 젖는다. 아직도 붉은 잎은 비에 젖어 선명하다. 선명하게 드러나 길바닥에 깔렸다. 비에 젖은 기와지붕 물받이에 퇴근시간 도심 거리의 정체된 도로처럼 붉게 반짝이는 단풍 낙엽이 쌓였다.

가을, 참 추레하게 끝나는구나! 싶다가도 산동네 사람들의 발걸음과 함께 한 지난날을 생각하면 가을도 우리도 다 한통속 같다.

오랜 친구 떠나는 길 배웅하듯 빗속을 걷는다. 산비탈 계곡 실오라기 같은 물줄기가 냇물이 되고 더 큰 물줄기를 만나 강이 되듯 동네 골목길을 벗어나면 이면도로를 만나고 그 도로는 더 큰 도로를 만나 흐른다.

한강다리를 건너 종로로 향하는 시내버스에 몸을 맡긴다. 덜컹거리는 삼류 시내버스가 비의 장막을 부수며 돌진한다. 삼류는 그래야 한다. 온 몸으로 나아가야 한다. 앞뒤 재고 이리 짜내고 저리 맞출 여력이 없다. 다 던지고 나서 숨 쉴 겨를이 있으면 그때가 돼서야 돌아보는 거다.

어둠이 내릴 때쯤 종로 조계사 앞 인사동길 초입에 도착했다. 다행히 빗줄기가 아직 굵다. 비가 그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로YMCA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시골집이 나온다. 국밥이 괜찮은 집인데 한옥이다. 사실 한옥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그러기에는 빗속을 걸어서 떠나가는 가을의 뒷모습이 무거워보였다.

 

 

▲ 종로 뒷골목

사랑이라면 괜찮을까? 가을이 떠난 자리에
시골집 문 앞을 그냥 지나쳐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종로 뒷골목이다. ‘주룩주룩’에서 ‘추적추적’으로 겨울비가 긴장을 푼다. 그 골목을 서성이는 데 오도가도 못하는 가을이 나를 위로한다.

처지가 같다는 게 이런 건가? 골목길은 걸음을 흡수한다. 그 속으로 빨려들 듯 길을 따른다. 골목은 인사동 차도와 연결된다.

우선 배를 채워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종로3가전철역 부근 ‘2000원 국밥 거리’에서 한 끼 밥을 먹기로 했다. 오늘은 큰 맘 써서 그 거리에서 가장 비싼 2500원 짜리 아욱국밥을 먹는다.

 

 

▲ 종로3가 전철역 부근 아욱 국밥집

‘가을 아욱국은 문 닫고 먹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다. 이 가을도 끝이니 가을을 보내기에 이 보다 좋은 음식이 어디있으랴! 뜨거운 국물에 속이 따듯해진다.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입안에서 밥알이 터지는 느낌까지 음미하며 천천히 먹었다.

 

그리고 탑골공원 동문 부근으로 자리를 옮긴다. 옛날 파고다극장 자리다. 그곳에는 아직도 ‘대포한잔’이 살아있다. 잔술을 판다.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라주고 1000원 받는다. 번데기 양파 된장 김치가 접시에 담겨 쟁반에 놓였다. 잔술 안주다. 안주를 든든하게 먹으려면  1000원 짜리 돼지불고기를 시키면 된다.

 

 

▲ 탑골공원 뒷골목 잔술집

종이컵 가득 담긴 소주를 한 번에 다 들이킨다. 그리고 돼지불고기 한 젓가락 입에 넣고 씹는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소주의 향기가 역류하면서 코끝에서 퍼진다. 우산을 접는다.

 

1000원을 내고 소주 한 컵 더 시켰다. 비가 머리에 내린다. 비에 젖는다. 비는 하늘이 보내는 무슨 신호 같았다. 수직의 신성이 사람의 땅과 만나기 직전에 내 머리에서 부서지는 것이다. 나를 비껴간 빗방울들은 해독되지 못한 채 지상으로 떨어져 스미는 거다. 비의 언어로 올올이 젖은 머리카락, 온 몸의 솜털이 일어서 떨린다. 내가 풀지 못한 말이 있다면, 내리는 빗줄기 저 무수한 빗장을 열면서 가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을 알고부터 언제나 가을이 진 빈자리는 처음 같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처음처럼
탑골공원 담벼락을 타고 이제는 내가 흐른다. 대한민국 국보2호 원각사10층석탑과 보물3호 원각사비가 그곳에 있다거나 1919년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 탑골공원이라는 것은 그 밤에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거리가 휘황하다. 다시 골목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둠을 어둠으로 볼 수 있는 곳, 아주 작은 불빛도 반짝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곳, 골목은 그렇게 다시 내 앞에 다가왔다.

 

 

▲ 인사동 골목

빗줄기는 ‘주룩주룩’과 ‘추적추적’을 오가다가 간혹 멈추기도 했지만 완전히 그치지는 않았다. 골목길을 따라 걷던 발걸음을 청계천 어디쯤에서 멈췄다. 아마도 그 사이 어딘가에서 몇 잔 더 했을 것이다.

 

내가 장미 한 송이를 사서 가방에 곱게 모셔놓았다는 것을 안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잠에서 깨보니 작은 거실에는 단풍잎 몇 잎이 나뒹굴었고 가방에는 장미 한 송이가 들어있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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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