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사(華巖寺)
화암사(華巖寺)
  • 나무신문
  • 승인 201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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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33 | 한국의 사찰 ⑧

▲ 극락전 내부
입지
화암사가 큰 사찰이 아니면서도 깊은 울림이 전해오는 이유는 큰 산세의 기운에 면해 있기 때문이다. 화암사가 안긴 불명산은 금남정맥의 밑뿌리인 운장산(1126M)과 대둔산(878M) 등에 맥이 닿아 있다. 지리상으로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를 이루는 그 산맥은 모태인 백두대간의 흐름과 반대로 뻗쳐 있는데, 그로써 주변 산세가 더 치렁하게 되어 그곳을 찾아갈 때는 평지로부터 점차 크고 험준한 지역으로 들어서는 것을 느끼게 된다. 화암사는 그러한 산세의 안온한 터에 자리 잡고 있어 깊고 그윽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화암사에는 길이 없다. 길은 길이되 통상의 길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주차장에서 걸어 들어가다 보면 그 좁던 길마저 없어지고 물이 흐르는 자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래서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약간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때는 바닥의 자갈돌을 살펴 디뎌야 하고 좁은 계곡 벼랑을 골목처럼 지나야 한다. 그렇게 더 나아가다 보면 지형의 단 차를 따라 쏟아지는 작은 폭포도 두엇 만나게 된다. 어떤 때는 지나는 사람들의 위험을 막고자 공사 현장용 발판을 깔아 놓을 때도 있다. 그리고 그처럼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동안 사람들의 의식은 점차 세속과 멀어지게 된다.

절벽을 올라 들어온 쪽을 바라다보면, 어느새 굽이굽이 중첩된 능선이 저만큼 멀리 펼쳐져 보인다. 그리고 그 계단을 올라 조금만 더 가면, 화암사는 그 위치를 모른 채 계곡 길을 더듬어 올라간 이들에게 불명산 어느 뫼에 홀연히 나타난다. 산 속을 헤매다 나타나는 그 홀연한 마주침은 마치 구도의 길을 나선 사람이 오랫동안 헤매다 극락의 세계를 만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계곡을 거슬러 어렵게 찾아가 맞닥뜨리는 건물은 성채의 입구처럼 앞을 굳게 막아서고 있다. 작은 다리 너머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우화루의 뒷면인데 마당 쪽에서 보면 단층이지만, 입구 쪽에서 보면 2층 구조여서 더 성채처럼 굳세 보여 마치 읊조리기라도 해야 들여 줄 태세다. 홀연히 나타난 반가움과 그 배척감에 잠시 혼란스런 마음을 가다듬고 보면 좌측 계단 위에 통로처럼 낮은 입구가 보인다.

 

▲ 전면의 넓혀진 축대
연혁
화암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신라시대 진성여왕때 일교국사가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 오지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선조 5년(1572)에 기록해 세운 <화엄사 중창비>에  “옛날 신라의 원효와 의상 두 조사께서 중국에 유학을 갔다가 도를 얻고 귀국하여 이곳에 주석하였다. 두 분은 사찰을 짓고 머물렀는데, 절 법당의 주불인 수월자용(水月姿容) 보살은 의상 스님이 도솔산에 수행하러 갔다가 친견했던 자용과 등신(等身)으로 조성한 원불(願佛)이었다. 절의 동쪽에는 원효가 도를 닦은 원효대(元曉臺)라는 법당이 있고  남쪽 고개에는 의상암이라는  암자가 있으니 모두 두 분 조사께서 수행하시던 곳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절의 창건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감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비문에 “조선 초기의 관리로 있던 성달생이 절을 세우고자 터를 찾다가 신라 시대에 화암사가 있던 이 자리가 산 좋고 물이 맑아 적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제종 7년 이곳에 다시 화암사를 세웠다”는 내용은 확실한 듯하다. 그 때 3칸의 불전을 매우 화려하게 짓고 차례로 승당, 조성전 등 여러 건물들을 완성하였는데 당시 지은 3칸 불전이 극락전인 것으로 전해진다. 극락전 내의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동종은 저절로 울려 스님들을 깨웠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데, 그 종은 일제 강점기 때에는 스님들이 땅에 묻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꺼냈기에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 극락전 전후면의 하앙식공포
배치 및 공간구조
화암사 극락전은 전통 건축 가운데 유일한 하앙식 구조로 되어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러한 양식적 특별함이 이 사찰을 특별한 곳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측면이 크다. 하지만 가람으로서 빼어남은 입지에 알맞은 전체적 배치의 짜임새이다.

한국전통 건축은 지형지제 등 입지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건축적 품격형성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규모에 비슷한 배치의 건물일지라도 입지조건에 따라 그 느낌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화암사는 전체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배치도 단순한 구도이지만 건물들의 종교적 성격이나 각기 다른 용도의 건물 간의 결합이 아주 멋스럽고 감각적으로 짜여 있다. 이곳에서 극락전 앞마당은 건축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찰 중심에 놓인 그 마당은 주불전인 극락전과 전면의 우화루 그리고 좌우측에 놓인 적묵당 등이 ㅁ자 형태로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 우화루 바닥과 연결된 극락전 마당
불상을 모신 의례공간은 불전 내부지만 마당은 전체 사찰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마당의 중심성은 단순히 건물이 사방에서 둘러쳐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적극적인 관계 설정에 의해 여느 마당에서 느낄 수 없는 풍부한 교감의 감각을 갖추고 있다. 즉 그 마당에 면한 우화루나 적묵당의 구조가 마당과의 연계에 의해 입체적 감각이 부가되어 있다. 우선 우화루 내부 대청마루는 극락전 마당과 연계되어 확장된다. 그리고 적묵당 마루는 마당에 입체적인 공간감을 띈다.

화암사의 진입 동선은 골목과 같은 통로를 따라 들어와 한편으로 조용히 움직이게 되어 있다. 사람들은 안으로 진입하면 무의식적으로 적묵당 마루에 앉게 된다. 화암사의 내부 동선은 참 알뜰하다. 주입구를 통해 들어오면 적묵당의 마루 앞을 지나게 되는데, 마당 중심에서 비켜선 그 동선이 간결하여 마당의 힘을 깨뜨리지 않는다. 동선은 마루와 만나고 잠시 머무르다 다시 조용히 움직인다. 그 조용한 몸가짐들이 차분한 분위기를 지켜 주고, 도량의 엄숙함을 유지하게 된다. 이 정도 규모로 아늑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다. 우화루 아래에서 곧 바로 진입했더라면 지금 같은 호흡을 느끼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입하면서 2층으로 보이는 우화루는 뒤편 마당에서 보면 마룻바닥이 마당 지면과 거의 같은 높이로 된 1층 구조인데 마당 쪽 벽이 없이 바로 트여 있어 마당의 영역이 그 내부까지 확장되어 보인다. 화암사의 마당은 적정한 크기로 짜여 있을 뿐만 아니라 우화루 바닥과 연계되면서 공간의 가변성과 밝고 어두움, 열리고 막힘 등의 미묘한 감각적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 화암사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다.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