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落山寺
낙산사 落山寺
  • 나무신문
  • 승인 2014.11.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31 - 한국의 사찰 ⑦

▲ 홍련암
입지
양양 낙산사는 동해안을 따라 펼쳐진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그 북쪽에는 고성, 삼일포 총석정, 화진포 청간정, 등이 있고 남쪽으로는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등이 있는데 모두 동해의 풍광과 어우러지며 멋을 발하고 있다.

속초에서 강릉 방향으로 동해안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좌측 해안 쪽으로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솟아 보이는 양양 낙산사는 그 산 일대에 별천지를 이루고 있다. 이 곳 의상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는 동해 특유의 깊고 드넓은 감각이 생생히 다가온다. 의상대는 그처럼 경승의 감각과 망망대해의 호젓함이 어우러진 곳이다.

 

▲ 원통보전
연혁
낙산사의 창건은 전설적인 일화로부터 시작된다. 의상대사가 현신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후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이곳에 관음 도량을 지었다는 이야기이다. 낙산사가 입지한 이곳이 바로 보타 낙가산에 비유되는 관음의 도량이다. 망망대해의 동해바다와 호젓한 풍경이 그러한 성스러운 장소성을 띠게 한다. 낙산사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히며 세계 8대 관음 성지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를 증명하듯 낙산사 홍련암에는 바위틈에 형성된 굴이 있다.

관음보살은 중생과 가장 친근한 보살이다. 『화엄경』에는 「보살주처품(普薩住處品)」이 별도로 있어서 금강산에는 법기(法起)보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천관산에는 천관(天冠)보살이 상주설법(常住說法)한다고 설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이름 그대로 세상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소리를 다 들으시고 부르는 이의 바람대로 언제 어디서나 모습을 나타내 구원해 주시는 자비의 화신으로,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은 과거 구원겁 전에 이미 성불한 정법명여래(正法明如來)로 계시다가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중생제도의 대비원력을 세워 보살의 형상으로 나타나 중생을 제도하시는 자비보살이다. 이와 같이 중생제도를 위해 부처님께서 보살의 모습으로 낮추어 보살사상을 실천하신다고 한다.

▲ 범종루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일화는 『삼국유사』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조에 전해진다.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른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고, 또한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함께 받아서 물러 나왔다. 그 후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관음보살의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의상은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듯 했고 대나무는 다시없어졌음으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의상은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고 한다.

낙산사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설화도 전해온다. 원효가 낙산사의 남쪽 교외에 이르렀을 때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장난삼아 그 벼를 얻고자 청했다. 여인 역시 ‘벼가 없다’고 장난으로 대답했다. 원효가 다시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을 청함에 연인은 그것을 빨던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그 물을 쏟아버리고 손수 깨끗한 물을 떠서 마셨다. 그 때 들판에 있던 소나무 위에서 한 마리 파랑새가, “제호를 마다한 화상(和尙)아!”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는 비로소 앞에서 만났던 여인이 곧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임을 깨달았다. 이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불렀다. 원효는 관음성굴에 들어가 그 진용(眞容)을 보려했지만 파도가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한다.

 

▲ 관음보살입상
배치 및 공간구조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 중 하나인 낙산사는 해변에 자리 잡은 특이한 구조를 갖춘 절이다. 낙산사는 크게 원통보전, 관음보살상, 의상대, 홍련암 영역으로 구분 할 수 있다.

낙산사는 관음 도량으로서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위계상으로 사찰의 중심 전각은 대웅전 영역이다. 낙산사 경내로 들어서는 길은 마치 나지막한 산을 오르듯한 분위기로 되어 있는데 경내로 들어서는 문은 특이하게 성루로 되어 있다. 불의의 화재가 발생한 후 복원 과정에서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해 반듯한 축을 이루도록 했다. 
 

낙산사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원통보전은 관음보살을 주불로 보신 전각으로서 사찰로서의 중심 영역을 이루고 있다.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창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전각이다. 관음보살이 여의주와 수정 염주를 주면서 나의 진신은 볼 수 없으나 산으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 곳에 절을 세우라는 말을 듣고 사라진 곳이 바로 이 원통보전의 자리라고 한다. 그 안에는 보물1362호인 건칠관세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그 앞의 칠층석탑(보물499호)은 원래 3층인데 1467년(세조13) 7층으로 만들어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전면으로 좌우 행각과 정면 앞쪽에 놓인 빈일루가 반듯한 영역을 구성하고 있다. 그 옆 범종루는 불에 탄 것을 십자각 형태로 다시 지어 놓은 것이다.

원통보전에서 바다 쪽으로 건너보이는 나지막한 봉우리에는 거대한 관음석상이 조성되어 관음 도량의 상징적 공간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그 것은 동양 최대의 관음상으로 낙산사의 시각적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그 아래에 지은 전각은 적멸보궁처럼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고 창을 통해 관음상이 보이도록 해 놓았다.

그리고 홍련암은 의상과 관음보살의 친견을 상징하는 곳이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의상대는 명승지답게 주변 풍광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는데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자 기도를 올린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의상대를 지나 바닷가 길을 따라가면 홍련암이 나온다.

홍련암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세웠고 광해군 12년(1619)에 고쳐 세운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 있는 건물은 고종 6년(1869)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내부 바닥에는 관세음보살이 머물렀다는 바위굴을 볼 수 있도록 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네모진 유리창이 설치되어 호기심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다.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