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
공존
  • 나무신문
  • 승인 2014.11.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대구 불로동고분군 아양기찻길

▲ 불로동고분군은 산책코스로 좋다
몇 해 전까지 나에게 대구는 여름에 가장 더운 도시, 섬유산업의 도시, 사과의 도시 정도였다. 유명한 여행지는 팔공산 하나 정도 있다고 여겼다.

대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에 대구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대구가 품은 여행지를 하나 둘 알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대구는 대대적으로 여행을 꿈꾸기 시작한다. 나라에서 ‘한국 방문의 해’라는 표어를 내걸고 외국인 여행객 유치에 힘을 모으는 것처럼 대구도 국내외 여행객을 유치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대구는 나에게 하나씩 가까워졌고 드디어 대구의 여행지를 내 방식대로 재편집하기 시작했다.

 

따듯한 무덤, 불로동고분군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335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과거와 현재가 손잡고 미래로 걸어가는 곳이다.

5~6세기 삼국시대 사람들이 묻힌 무덤이 모인 이곳을 불로동고분군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사람 사는 마을 뒷동산 같다. 산들바람 부는 동네 공원 같다. 졸음 겨운 오후의 햇살이 혼자 졸다가도 좋은 곳이다.

불로동고분군에 도착한 건 늦은 오후였다. 길어진 그림자를 끌고 풀밭에 봉긋하게 솟은 고분 사이로 난 길로 걸었다.

▲ 불로동고분군. 경주의 고분 보다 크지 않다
길이 마을에서 시작됐으니 1500년 전 사람들이 무덤을 쌓고 영영 이별을 고하며 눈물을 흘렸을 그 자리에 1500년 뒤 사람들의 생활이 이어진 것이다.

그곳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마을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생활의 편린이 파편처럼 박혀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에서 멀어진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저절로 가지를 치고 편안하고 평온한 마음 하나로 깃든다.

먼저 올라온 아이들이 고분 위에 앉아 있다. 엄마 젖을 만지며 잠든 아이 같다. 젊은 아줌마들은 오솔길에 앉아 풀밭을 바라본다. 양복 입은 중년의 남자의 걸음이 무거운 걸 보면 고민의 무게를 이곳에 덜어 놓고 싶은 마음을 것이다. 또 다른 길로 올라온 아줌마들이 빠른 걸음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무덤이 따듯하다.

아이들이 앉아 있는 고분으로 올라간다. 낮은 산 전체가 고분이다. 고분이 끝나는 언덕 기슭에서 마을이 시작된다. 경계가 아니라 매듭이다. 나누어졌지만 하나로 묶인 실선이다.
92호 고분의 주인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고분에 작은 꽃을 피웠다. ‘그대여 안녕하신가’

 

기찻길 위 카페
해는 떨어져도 하늘은 아직 환하다. 그 틈을 비집고 아양기찻길에 도착했다. 강가 가로등이 막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1917년 동대구에서 영천 사이에 놓인 기찻길이 2000년대 후반에 외곽으로 이설되면서 ‘아양철교’는 그 자리에 남아 ‘아양기찻길’로 다시 태어나 여행자를 반긴다.

저녁에서 밤으로 가는 사이 어둠은 갑자기 다가오지 않고 서서히 눈에 스민다. 그 사이 마을의 불빛은 밝아지고 가로등 불빛 아래 마지막 비행을 하는 새 몇 마리가 내려와 앉는다.
그런 풍경을 볼 수 있는 아양기찻길이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 아양기찻길에서 본 야경
옛 선로가 남아 있는 기찻길 위를 걷는다. 장바구니를 들고 늦은 저녁상을 차리러 집으로 가는 아줌마와, 노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저씨의 낡은 자전거가 내 앞에서 교차한다. 다리 입구부터 손을 놓지 않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의 뒷모습을 따라 철교 중간에 있는 카페에 도착했다.

아양철교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 디지털박물관이 소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화면을 바라보며 아양철교의 옛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따듯한 차 한 잔 주문하고 카페를 둘러봤다.

철교 위 카페는 또 다른 운치로 다가왔다. 차 잎을 직접 우려내는 건 아니었지만 주문한 쟈스민차의 향을 즐기는 사이 대구의 향긋한 밤이 깊어진다. 

 

끝나지 않을 이름, 김광석
숙소를 잡고 짐을 푼 뒤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반주로 즐긴 소주에 얼굴이 붉다. 언제나 청춘 같은 생맥주로 입가심을 하는 사이 시간이 벌써 11시다.

나는 ‘김광석거리’를 가자고 주장했고 일행은 지금 가봐야 ‘아무것도 없다’고 타일렀다. 그들은 숙소로 돌아갔고 나는 혼자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김광석거리를 찾아갔다.

그들의 말처럼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쓸쓸한 어둠이 그 거리 담벼락 김광석의 얼굴에 내려앉았을 뿐이었다. 불을 켠 몇몇 주점도 파장이다.

▲ 김광석거리의 김광석 조형물
김광석은 ‘김광석거리’가 있는 방천시장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곳을 떠나 서울로 전학을 갔지만 이 거리는 그를 다시 불렀다.

기타를 치고 있는 그의 동상 앞에 앉아 있었던 건 그의 노래를 듣기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그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고 나는 나만 들릴 정도로 소리 죽여 그의 노래를 불렀다. 거리에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Tag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