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첫 왕비가 잠든 곳
조선의 첫 왕비가 잠든 곳
  • 나무신문
  • 승인 2014.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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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정릉과 흥천사

 

▲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의 릉, 정릉

1409년 음력 2월 조선 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자 자신의 계모 신덕왕후의 능(정릉)을 지금의 중구 정동에서 현재 정릉이 있는 곳으로 옮긴다. 언 땅이 다 녹기도 전에 땅을 파서 이장을 한 것이다. 신덕왕후는 죽어서 후궁으로 강등되었다.(1669년 현종이 송시열의 상소를 받아들여 복권을 명하고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능을 재조성 했다. 2009년 정릉은 조선왕릉 40기에 포함되어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 그도 모자라 이방원은 능에 있던 석물을 광통교를 만드는 데 썼다.

태종 이방원이 그렇게 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방원을 낳은 어머니는 태조 이성계의 첫 부인이었지만 왕비의 자리에 앉은 건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였던 것이다.

 

 

▲ 정릉산책로

정릉의 오후
정릉입구 시내버스 정류장에 정릉까지 가는 길은 서울 같지 않다. 80년대 시골 작은 읍내 같은 분위기다.

떡볶이와 어묵이 끓고 있는 구멍가게, 기름을 짜는 방앗간, 과일전, 생선 몇 마리 없는 어물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꽤 현대적인 분위기의 슈퍼마켓은 농협 하나로마트의 전신 쯤 되는 농협 연쇄점 같다. 마을 어귀 나무는 동구나무를 닮았고 그 아래 작은 평상과 의자에 모인 할아버지들은 동구나무 아래 앉아 쉬는 그 옛날 할아버지들과 다를 게 없었다. 

오후 2시가 다 돼 정릉에 도착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평일이었지만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단풍 지난 마른 나뭇잎 같은 늙은 사람들이 이제 막 물드는 단풍 그늘에 앉았다.

더러는 지팡이를 짚고 세 발로 천천히 걸음을 떼기도 한다. 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한 아저씨가 기우뚱 거리면서 진지하게 발걸음을 뗀다. 50대가 어린 축에 드는 그 자리에 젊은 남녀 커플이 도드라진다.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단풍그늘을 벗어나 아직도 창창한 초록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조선의 첫 왕비자리에 올랐지만 죽은 뒤에 능이 파헤쳐져 다른 곳으로 옮겨져야했던 수모를 겪은 신덕왕후의 그림자가 산그늘이 되어 내려오는 것 같다.

홍살문을 지나 능이 보이는 그 언저리만 햇볕이 고였다. 능 앞에는 책이 꽂혀 있는 간이 도서진열대가 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 책을 보고 싶으면 읽고 나서 다시 그 자리에 꽂으면 그만이다. 그러고 보니 책 읽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 흥천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의 원찰이다

능보다 산책
이런 곳까지 와서 책을 읽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능은 책 읽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다. 능은 가만히 앉아서 쉬거나 천천히 걷기 좋은 곳이다.

햇볕을 쪼이며 앉아 있다가 산책길에 나선다. 관리소에서 표를 사서 들어올 때 들은 대로 능을 둘러 싼 낮은 산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아주 느리게 걷기로 했다.

문 닫기 전에만 나가면 되는 일이었고 그 이후에도 나는 계획이나 일정이 없었으니 산책에 걸리는 시간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길은 넓고 경사는 완만했다. 길 곳곳에 쉼터를 마련하고 의자를 놓았다. 능선을 다 돌지 않고 중간에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코스도 있었지만 능선을 다 돌아보는 가장 긴 길을 선택했다.

도토리가 ‘후두둑’ 떨어지는 길을 걷는 건 다람쥐나 나에게 다행스런 일이었다. 길을 가로지르는 다람쥐의 줄행랑이 이 길에서는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길에 있는 내가 이물질이라는 생각도 든다.

능선이라고 해봐야 옛날에 뛰어놀던 뒷동산 언덕 하늘금도 안 될 것 같은 높이와 경사다. 구불거리는 오솔길과 작은 통나무를 덧대 만든 계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풍경이 된다. 바람도 지나가는 길이 있으니 솔숲 바람길에 서서 솔바람을 맞는다.  

 

 

▲ 흥천사 극락보전

신덕왕후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 흥천사
정릉을 나서는 길목, 관리소 바로 앞에 ‘흥천사’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였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으니 이정표가 가리키는 ‘흥천사’ 방향으로 걷는다. 골목길은 도로에서 끝났고 흥천사는 도로 건너편에 있었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 이성계는 왕의 체통이나 권위를 다 버리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를 건립한다. 170여 칸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 이성계는 사흘이 멀다하고 흥천사를 찾았다. 흥천사를 가지 못하는 날은 흥천사 종소리를 들어야 수저를 들었다고 한다.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현재의 중구 정동에 있던 정릉을 지금 능이 있는 자리로 옮긴 이후에도 흥천사는 왕실사찰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510년(중종5) 유생들이 일으킨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지금의 위치에 절을 새로 지으면서 신흥사로 개칭했다. 1865년(고종2) 흥선대원군 등의 시주를 받아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이름을 다시 흥천사로 고쳤다.

지금 흥천사에는 1853년(철종4)에 지은 극락보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6호), 1855년(철종6)에 지은 명부전(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7호)이 있다. 만세루에 걸려있는 흥천사 현판글씨는 흥선대원군의 필체다.

흥천사는 작은 절이지만 서려있는 역사 이야기를 되새기며 곳곳을 둘러보다보니 날이 저문다.

흥천사를 떠나는 길에 주련문구가 눈에 들어온 건 우연이었을까? ‘고통을 달게 받아야 뜻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손해와 수모를 받아들일 줄 알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네, 스스로 웃을 수 있으면 이미 몸 밖의 몸을 이룬 것’

흥천사에서 큰 길로 나가는 길은 여러 갈래였지만 나는 80년대 풍 시골 소읍의 풍경을 닮은 거리를 통과해서 걸어 나오고 싶었다. 오늘 나의 절은 바로 이 거리였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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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