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仙巖寺
선암사 仙巖寺
  • 나무신문
  • 승인 2014.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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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29 - 한국의 사찰 ⑤

 

▲ 선암사 대웅전

입지
조계산은 두 대찰을 앞뒤로 품고 있다. 서쪽으로는 송광사가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는 선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그 두 고찰은 아주 대조적인 이미지를 띠고 있다. 송광사는 잔잔한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너른 마당을 둔 대웅전을 중심으로 겹겹이 둘러싸듯 즐비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규범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고려시대 불교계의 정화 운동을 펼치고 선종과 교종을 하나로 아우러 조계종을 개창한 보조 지눌 국사 등 16국사를 배출하여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로서 위상과 명성이 높은 곳이다. 그런데 선암사는 산에 파묻혀 수도에 전념하고자 하는 선승들처럼 아주 조용하고 명상적인 느낌으로 발길을 끄는 곳이다.

선암사가 안긴 조계산은(850m)은 그리 높지 않지만 백두대간의 여느 큰 산 못지않은 넉넉한 깊이가 느껴진다. 그 감각은 호남정맥의 몸체를 이루는 지리적 기세에다 이웃한 섬진강 너머 지리산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 조계산 산자락에 감싸인 경내

연혁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에 아도화상이 세운 비로암을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도선이 재건하였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 풍수지리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대사가 호남을 비보하는 3대 사찰인 3암(진주 영봉산 용암사, 광양 백계산 운암사, 조계산 선암사)의 하나로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남방비보삼암사(南方裨補三巖寺)라는 명칭도 이 시기에 등장했는데, 선암사가 뒷날 천태종의 근거지가 될 때 도선 비기로 전해지는 호남 비보 3암사와 연관시키면서 선암사 사적기(寺蹟記)에 도선 국사의 확장 사실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선암사 사적기는 강희 43년 갑신, 즉 숙종 30년(1704) 늦봄에 계음·호연이 지은〈전라도 순천군 조계산 선암사 사적〉이 가장 오래 된 것 일뿐이고 그 이전 기록은 정유재란때 사우와 함께 불타 버려서 확인 할 길이 없다. 계음대사는 거기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선암사를 천태종의 중심사찰로 크게 중창한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실재 있었던 일로 보인다.

선암사는 고려 중기인 1192년 (고려 선종 9년)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중국과의 문화교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송나라에 가서, 고승들과 교류하면서, 장소(章疏 : 대장경에 관한 연구 논문)를 수집하여 돌아왔다. 귀국한 후에도 계속하여 장소 수집과 고승과의 교류를 계속하였으며,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된 후 송·요 등에서 수집한 장소를 간행하였다.

이를 의천의 교장(敎藏)이라 하는데, 그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 에는 1086종 4800여권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의천의 교장 수집과 간행은 고려를 축으로 송·거란·일본 등 동북아시아의 불교문화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선종이 의천에게 하사한 금란가사, 대각국사 영정, 의천의 부도로 전하는 대각암 부도가 선암사에 전해오고 있다.

 

 

▲ 승선교

배치 및 공간구조
흔히 선암사를 한국 최고의 고찰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이곳의 건립 연대가 월등히 오래되었거나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 많아서가 아니다. 선암사의 주요 건물들도 모두 임진왜란 후에 중건된 것들로서 그리 오래된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선암사가 한국의 최고 고찰로서 인식되는 이유는 근래 전국의 여타 사찰들이 한해가 다르게 속세적 느낌으로 변해가는 것과 다르게 이곳은 옛 사찰의 느낌을 변함없이 간직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선암사의 진입은 어느 절보다도 호흡이 길게 느껴진다. 입구로부터 경내까지는 승선교(昇仙橋) 너머로도 강선루, 천왕문, 불이문 등 과정을 차례로 지나고 가늠키 어려운 자연스런 길의 흐름을 따라 도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천왕문 입구까지 간직돼온 자유스러움은 휘돌아진 길에서 직각으로 꺾여 나 있는 일주문 계단을 들어서면서 갑자기 엄숙해지고 그 엄숙함은 도식적 질서로 이루어진 대웅전 앞마당에 이르러 고조된다. 하지만 선암사 경내에서 느껴지는 엄숙함은 거기로서 다이다. 대웅전 영역은 대칭으로 서 있는 석탑과 주불전의 웅대함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지만 그 이외의 시설들은 규율에서 벗어난 듯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은 전체로부터 단절되지 않고 총체성 안에서 느껴지는데. 그처럼 단일한 총체성 안에서 개별적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것이 이 사찰의 덕목이다. 선암사의 가람 배치는 도식적 질서와 자유로움이 조화되어 있다.


일주문에서부터 응진전까지를 직선으로 잰다면 꽤 먼 거리이지만, 각 영역이 인위적인 축선 상의 거리로 구속되어 있지 않고 필요에 의해 자유롭게 찾아가는 장소이기 때문에 그 걷는 거리의 피곤함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응진전은 원통전이 앉은 축대를 따라서도 갈 수 있지만 뒤로 돌아 별도의 길로도 갈 수 있으며, 독립된 마당을 갖고 있어서 별개 암자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 외의 시설들도 자율적인 개별 영역을 갖게 되어 있어, 전체 안에서 다양한 장소성과 건축적 정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그 독특한 분위기가 경내를 감싸는 산자락과 경내를 가로지르는 길로부터 생겨난다. 크고 부드럽게 터를 감싸는 산자락은 하나의 장소성을 갖게 하고 수행 생활에 알맞게 갖춰진 경내의 불전과 요사체 등의 건물들은 각각의 쓰임새에 따른 위계적 연관성을 갖도록 짜여 있다. 그에 비해 경내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는 도식적 틀에서 벗어나 각각의 건물이 독립적 장소성과 각기 다른 감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 뒤편 지형차가 큰 축대 뒤에 놓인 길에 오르면 마치 경내를 벗어나는 듯한 새로운 기분으로 여백적 분위기를 띠면서 바람결과 푸른 하늘을 한가롭게 느낄 수 있고 마을길을 거닐 때처럼 그 길에 면한 건물들의 다양한 체취를 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면서 대웅전과 요사체의 뒷맵시가 산세와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나 저만치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세를 그윽이 느낄 수 있다.


그 같은 선암사 건물들의 다채로운 인상은 고찰로서의 느낌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출가자의 수행 목적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여 깨달음과 해탈의 길로 나아가고자 함이다. 탐진치(貪瞋癡)의 불꽃을 모두 꺼뜨리는 것을 수행의 기본으로 여기는 출가자들은 검박한 생활을 근본 덕으로 삼는다. 그래서 불상을 모신 전각의 화려함과 소박한 요사체 등 다양한 성격의 인상이 자연의 품안에서 어우러지면 사찰의 깊이감을 자아낸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다.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