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松廣寺 -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僧寶宗刹 曹溪叢林 松廣寺)
송광사 松廣寺 - 승보종찰 조계총림 송광사 (僧寶宗刹 曹溪叢林 松廣寺)
  • 나무신문
  • 승인 2014.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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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28 - 한국의 사찰 ④

 

▲ 산자락에 아늑히 감싸인 송광사

입지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송광사는 주암호 쪽에서 접근하는 조계산(850m) 자락에 있다. 송광사가 안긴 조계산은(850m)은 그리 높지 않지만 호남정맥의 몸체를 이루는 지형적 기세와 대비적으로 낮게 구릉진 인근 고을 들녘에 둘러싸여 있어서 여느 큰 산 못지않은 넉넉한 깊이가 느껴진다. 섬진강 너머에 이웃한 지리산과 거리상으로 가깝지만 산줄기로는 천리를 에둘러 온 위치이다. 

조계산이 속한 호남정맥의 산세는 특이하다. 맥이 곧바르게 뻗어가는 형국이 아니라 이리저리 굽이치듯 크고 작은 벌판과 물길을 에두르면서 넉넉한 고장을 낳기도 하고, 때로는 큰 산세로 또는 나즈막한 산세로 아담한 고을을 품으며 청아한 경관을 이루어내고 있다.

그리고 조계산 정상을 경계로 행정구역이 서로 다른 순천시 승주면과 송광면, 보성면에 걸쳐 있는데, 그 고을들이 모두 푸근한 땅 내음을 지닌 곳이어서 더 깊은 느낌이 든다.

조계산 너머 동쪽으로는 선암사가 있는데 같은 산에 속해 있지만 각각의 사찰이 대하는 인근 고을들은 각기 다른 영역을 이루고 있다. 즉 송광사는 화순, 담양, 곡성 등 위쪽 고을들과 연계되는데 비해 선암사는 낙안, 순천 등 아래쪽 고을들과 연계된다.

 

 

▲ 우화각과 개울

연혁
불교에서는 불(부처) 법(경전) 승(출가수행자), 세가지를 3보라 한다. 그 세가지는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으로 예배대상, 교리, 신앙 공동체는 종교의 성립 조건이기도 하다.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고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송광사는 고려시대 불교계의 정화 운동을 펼치고 선종과 교종을 하나로 아우러 조계종을 개창한 보조 지눌 국사 등 16국사를 배출하며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이어와서 승보사찰(僧寶寺刹)로서 위상과 명성을 갖게 되었다.
승보종찰의 터전을 닦은 이는 불일 보조국사(佛日 普照國師1158~1210)

이다. 국사는 홀연히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경지를 잃지 않도록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선정(禪廷)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여, 남종선의 입장에서 북종선을 아우르고,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통합하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편견과 분열로 지리멸렬되어 가던 고려 불교의 승풍을 크게 떨쳐 일으켰다.

그런데 대규모의 3차 중창을 일으키는 것이 16국사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고봉화상 법장(高峯和尙 法藏 1350~1428)때인 조선시대 정종 원년의 일이고 삼보종찰의 내용이 갖춰지는 것은 조선 초기이니 삼보사찰의 의미부여 또한 조선시대에 이루어진 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해청당 안마당

송광사는 보조국사의 문인 수우(守愚)가 강남(전라도)으로 안식처를 구하러 가서 송광사의 전신인 길상사(吉祥寺)를 지목하고 바로 그 곳을 장악하여 확장공사를 감행 그 해에 80칸의 건물을 짓는 대 역사를 끝냄으로서 대찰로서 닦여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승보사찰로서의 기틀이 세워졌는데, 그것은 정권의 비호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 같다. 한편 송광사의 위치를 남쪽에 잡은 것은 황해도 출신인 최충헌이 남쪽 경주 출신 이의민을 견제키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기틀이 잡힌 후 보조 국사는 최씨 형제가 옹립한 왕인 신종원년(1198)에 영천 팔공산 거조사를 떠나 길상사로 향하게 되었다. 가는 도중 지리산 상주무암에서 3년간 보낸 다음 신종 3년(1200) 길상사에 입주하여 정혜사(定慧寺)를 표방한다. 그 후 세자시절부터 보조국사를 스승으로 섬기던 희종이 등극하자, 희종은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어 어필 사액을 내림으로써 보조국사가 조계일문을 개창하였음을 국가적으로 공인하였다.

 

한편 송광(松廣)이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 송광사 대웅전

배치 및 공간구조
송광사는 조계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신평천을 따라 옆으로 펼쳐져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숲길을 한동안 걸어가면 조계문이 나온다. 그 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 우측에 척추당, 세월각이라는 작은 두 채의 건물이 보인다. 척주당은 남자의 영가를, 세월각은 여자의 영가를 씻기는 곳인데 특별히 여기만 있다.

좌측에 개울을 건너는 다리 위에는 우화각이 놓여 있다. 개울에 걸쳐 놓은 둥근 아치 다리와 화려한 건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내는데, 그 풍경은 송광사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꼽힌다. 그리고 개울을 건너 종고루 루 밑을 지나면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마당에 다다른다.  

 

 

▲ 보조지눌국사 부도

송광사는 잔잔한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너른 마당을 둔 대웅전을 중심으로 겹겹이 둘러싸듯 되어 있어서 마치 사찰 도시 같은 느낌을 준다. 너른 대웅전 마당은 빽빽이 배치되어 있는 주변 건물군과 배비를 이룬다. 불전들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의 위계를 형성하며 배치되어 있다. 좌측에는 선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좌측 후면에는 관음전이 독립되어 있다. 그리고 관음전 뒤로는 보주국사 지눌의 사리탑이 높다란 계단 위에  놓여 있다. 대웅전 바로 뒤에는 수행 공간이 있고 우측 뒤편에는 승보사찰을 상징하는 국사전이 있다. 그리고 대웅전 마당 우측에는 스님들의 일상 거처인 요사체와 공양간 등이 있다.

 

송광사의 요사체인 해청당과 공루는 마당을 둘러싼 ‘ㅁ’자 형태에 중층 건물로 되어 있다. 1층은 주로 스님들의 방으로 쓰이고 2층은 누다락 등 수납공간으로 쓰이는데 선암사 요사체와 함께 중층 건물을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요사체 바깥에는 조계산을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감싸며 흘러가며 앞산 자락의 실루엣이 사찰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관음전 뒤로 돌아 긴 오름 계단을 오르면 보조지눌국사 부도가 나온다. 그 자리는 송광사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곳이다. 그 이끼낀 석재 유물에서 한국 불교사의 맥박과 세월의 두터움이 느껴진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다.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