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 求禮 華嚴寺
구례 화엄사 求禮 華嚴寺
  • 나무신문
  • 승인 2014.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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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27 - 한국의 사찰 ③

 

▲ 각황전 정면

입지

화엄사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형제봉으로 뻗한 능선과 성삼재에서 천은사 뒤로 뻗힌 능선 사이에 감싸여 있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섬진강이 휘감아 흐른다. 남한에서 가장 너른 산세를 이루는 지리산 품에 있는 화엄사는 그처럼 큰 산세와 호젓한 강이 만난 입지로 인해 깊은 대자연의 정기가 감싸는 특별한 장소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삼보사찰이나 5대 총림이 아니면서도 그 존재감이 커다란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초기 사찰들은 주로 왕도(王都)에 위치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산지로 들어갔다. 그처럼 사찰의 입지를 산지로 택한 것은 청정한 공간에서 맑게 수행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 각황전에서 본 보제루

연혁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에 인도스님인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화엄사가 앉은 터가 원래 연기대사가 움막을 짓고 수도하던 곳 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인근에 사는 한 노인이 산에서 심상치 않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하고 마을 사람들과 그 곳으로 찾아가니 움막 안에서 천축국(인도)의 승려가 나와서 찾아간 이들에게 “저는 천축국(인도)에서 불법을 펴고자 인연국토에 왔습니다. 제가 이곳에 올 때에는 ‘연’이라는 짐승을 타고 왔는데, 연은 바다를 헤엄치고 하늘을 나는 짐승으로 제가 교화하여 제자로 삼았으며, 방금 독경한 것은 ‘대방광불화엄경’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그때부터 그가 연을 타고 다니므로 ‘연기대사’라고 부르며 그에게 법문을 청해듣고 깊은 신심(信心)을 얻게 되었다. 연기대사는 자신의 움막이 있던 자리에 절을 짓고 ‘화엄사’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 사사자상 삼층석탑

그 후 신라 문무왕 17년(677)에는 의상대사가 장육전을 짓고 그 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을 둘렀으며,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법당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도선국사’(827~ 898)는 15세 나이인 문성왕 3년(841)에 화엄사에서 승려가 되었는데 그가 도참설에 의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란을 입어 폐허화된 화엄사는 그로부터 30~40년이 지난 인조대에 벽암대사에 의해 다시 중창되기 시작했다. 벽암대사 (속명 각성은(1575~1660)는 임진왜란때 승병 대장으로 활동하다 인조가 즉위한 후 남한산성을 축조하는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맡아 승군들을 독려하여 일을 마무리하였으며 그 공로로 국가로부터 보은천교원교국일도대선사의 예우를 받고 의발을 예물로 받는다. 그 후 벽암은 화엄사의 재건에 나서서 인조 14년에 화엄사 대웅전을 완공시켰고 효종 원년(1650)에는 나라에서 화엄사에 선종대가람이라는 영예로운 교지를 내리게 된다.

 

 

▲ 영산전 쪽마루

배치 및 공간구조

화엄사의 배치는 종교적 상징성과 현세적 생활 공간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즉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대웅전에 이르는 주 진입축선 상에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이 차례로 서 있어 수직적 공간의 위계를 상징하는 한편 그 축선 좌우로는 수행 선원과 요사체 등 생활 공간이 위계적 연관성에 구애 됨 없이 자유롭게 놓여 있다. 

 

맨 앞에 ‘지리산 화엄사(智異山 華嚴寺)’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으로 다가가다 보면 우측에 부도가 있다. 그리고 금강문에는 금강역사와·문수보살·보현보살의 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조금 더 뒤쪽에는 사천왕의 상을 안치한 천왕문이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금강문과 천왕문이 일직선 축에 놓이지 않고 어긋나도록 되어 있는데 그 것은 대웅전 마당 정면에 놓인 보제루가 지형 흐름에 따라 좌측으로 조금 치우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천왕문 좌측에는 진월당이 있고 우측에는 공양간이 있다. 천왕문을 지나 축대 계단을 오르면 위쪽에 보제루가 서 있고 보제루를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단 아래쪽의 보재루, 적묵당과 단 위의 각황전(원래 이름 장륙전)과 대웅전이 맞코패집 형태로 마당을 위요하고 있다.

 

 

▲ 대웅전으로 오르는 길

대부분의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화엄사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는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입구에서 대웅전으로 향하는 중심축과 그에 직각 방향으로 놓인 각황전의 축이 ‘ㄱ’ 자로  직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배치 구조로 되어 있다. 한국전통건축 가운데 근정전 다음으로 규모가 큰 각황전(원래이름 장륙전)은 조선시대 중기 및 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사찰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외부에서 보면 중층 구조지만 내부에서는 단일 공간으로 되어 있다. 내부 바닥에는 청판을 깔았다. 우리나라 사찰의 불전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로 벽암대사의 문인이었던 계파대사에 의해 대웅전보다 70년쯤 늦게 지어졌다. 각황전에는 3불(석가, 다보, 아미타)과 4보살상(문수, 보현, 지장, 관음)을 모셨다. 그리고 전각 내부 벽면에는 화엄경을 돌에 새긴 화엄석경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각황전은 건물을 지은 것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 온다. 계파대사가 각황전을 지을 서원을 하였으나 방도가 없어 고심하며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때 한 노파가 나타나 자신이 시주를 하겠다고 하여 바라보니 절에서 밥이나 얻어먹는 신세인 사람이었다. 계파대사가 그가 돈이 있을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언짢은 표정을 짓자 노파가 벼랑에서 몸을 던졌는데 보살의 도움을 받아 환생하였다. 한편 숙종에게 태어나면서부터 한 손을 펴지 못한 공주가 있었는데 한양거리에서 지나가던 한 노파가 공주를 안아 쥔 손을 만지니 손이 펴지고, 공주의 손바닥에 장륙전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숙종이 시주를 하여 장륙전을 짓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숙종에게는 공주가 없었다. 다만 숙빈 최씨가 연잉군(후에 영조가 됨)을 위해 대시주가 되었다고 한다.

 

 

▲ 각황전 측후면

정면5칸 측면3칸 높이 35자의 대웅전은 보물 제29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원래의 건물은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불타 버렸으며 현재의 건물은 1636년(인조14)에 벽암선사가 중건한 것이다. 15칸의 단층으로 된 매우 드문 구조 양식의 건축물이다. 또 내부의 불화 및 돌층계 등도 특별하다.

 

화암사 경내에는 각황전(국보 제67호), 각황전 앞 석등(국보 제67호),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 화엄사영산회괘불탱(국보301호) 등 다수의 국보가 있다. 각황전 측면을 돌아 올라가면 유명한 사사자삼층석탑이 있다. 그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탑 중 하나로 불국사 다보탑, 실상사 백장암 탑과 함께 우리나라에 있는 3대 이형탑중 하나로 꼽힌다.

 

깊은 산지에 놓인 청정한 수행도량의 향기와 갖가지 귀한 보물을 긴직한 이곳을 찾을 때마다 불교 세계의 장엄함이 느껴진다.

사적 505  2009.12.21지정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다.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