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령길은 예약을 해야 출입할 수 있다. 기상청 일기예보를 보고 맑은 날을 선택해서 예약을 했다고 하더라도 일기예보가 맞지 않으면 먹구름을 머리에 이고 걷거나 오는 비를 다 맞으며 걸어야 한다. 당일 비가 오면 안 가면 그만이라고 하겠지만, 젖은 숲과 길도 싫지 않은 사람이라면 발길을 놓는 게 순리다.
나와 우이령길의 첫 만남이 그랬다. 잔뜩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때는 ‘우이동 먹거리 마을’ 간판을 지나면서부터였다. 갈까말까, 하는 사이 발은 벌써 ‘우이동 먹거리 마을’ 골목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우이령길을 걸었다.
땀 반 비 반으로 옷도 젖고 몸도 젖었다. 숲길은 싱그러웠다. 걷는 내내 상쾌했다. 빗방울 맺힌 풀잎, 꽃잎과 눈높이를 맞추려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빗방울 머금은 꽃과 풀잎은 비 오는 날에만 볼 수 있는 청초한 자태를 선물했다.
비 내리는 우이령길은 그렇게 나와 또 다른 만남을 약속하고 비오고 흐린 날 일찍 찾아오는 저녁 어스름으로 막을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 꼬드기기
바위가 많아 험하거나 계단이 많은 산을 싫어하는 아내에게 우이령길이 ‘딱 좋다’라고 생각한 것은 나 혼자 다녀온 비 오는 우이령길 코스 중 초입인 우이동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서부터였다.
아내는 흔쾌히 날을 잡겠노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작은 아이는 나와 관악산 인왕산 안산 등을 다닌 전력이 있으니 탕수육과 짜장면이면 쉽게 넘어올 것이 뻔했다. 하지만 큰 애가 문제였다. 학교 운동회 때 100미터 달리기도 놀며, 쉬며, 관중들 구경하며 달리던 아이인데…
이번에는 기상청 일기예보가 적중하기를 빌었다. 어떻게 마련한 기회인데, 당일 날씨가 우중충하거나 비라도 온다면 아이들은 분명 아빠를 탓할 테고 그러면 ‘온가족’으로 시작하는 산행이나 걷기여행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것인가.
우이령길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과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을 잇는 고갯길이자 지름길 이었다. 예전에는 이 길로 우마차가 다녔다. 한국전쟁 때 미군 공병대가 군사작전도로로 길을 넓게 닦았다.(우이령 고갯마루에 작전도로 개통 기념비가 있다.)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하려 침투했던 이른바 1.21 사건을 계기로 1969년부터 민간인 출입을 통제했다. 2009년부터 민간인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우이령길은 전체 6.8km다. ‘우이동 먹거리 마을’ 간판부터 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 약 1.8km,우이탐방지원센터에서 교현탐방지원센터까지 약 4.5km,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시내버스 탈 수 있는 도로까지 약 500m 정도 거리다.
본격적으로 싱그러운 숲길, 흙길을 걷는 구간은 우이탐방지원센터에서 교현탐방지원센터까지 4.5km다. 아내와 아이들도 이 구간을 걷는 내내 신났다. 다만 큰 애가 힘들다며 투정을 했지만 걸을 것 다 걸으면서 그러니 어찌 아니 예쁘겠는가!
우이령 고갯마루에는 유사시 받침대 위에 있는 콘크리트 덩어리를 도로로 떨어뜨려 적의 탱크 진입을 막는 군사시설인 대전차장애물이 남아 있다. 대전차장애물을 지나면 오봉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늠름한 바위 봉우리 다섯 개가 ‘떡’하니 앉아있는 모습은 비 오는 날 보이지 않던 부분을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아이들도 오봉의 풍경에 감탄했는지 ‘와 저기 봐, 저거’라며 다섯 개의 바위 봉우리를 가리킨다. 처음보다 더 기운이 나나보다. 계곡도 기웃거리고 이것저것 보고 느끼고 이야기한다. 시키지도 않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힘들다고 징징거리기도 했고 벌이 무서워 마음이 편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 길을 다함께 걸으며 웃고 떠들고 재잘대고 뛰어다닌 하루가 서로의 마음에 남아 있으니, 이정도면 ‘온가족 우이령길 걷기’는 성황리에 끝난 것 아니겠는가!
우이령길 교현탐방지원센터로 가는 길에서 약 800m 정도만 샛길로 빠지면 석굴암이 나온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얘기보다 눈에 보이는 절 풍경과 절에서 바라보는 산 풍경이 사람 마음을 더 사로잡는다.
자연동굴에 자리잡은 나한전도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삼성각 앞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마음을 크고 넓게 해준다. 그날은 왜 삼성각 앞 삼층석탑이 몸을 가누기 힘든 늙은 스님의 지팡이처럼 보였을까?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