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 島山書院
도산서원 島山書院
  • 나무신문
  • 승인 2014.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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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23 - 한국의 서원 ④

 

▲ 도산서원 전경

 

입지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한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이다. 그 곳은 안동호 물길이 채워지는 낙동강 최상류 지점의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서원의 뒷산 너머에는 이 고장의 삶의 터전인 도산면 고을이 있다. 그 마을은 원래 진성 이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퇴계 종택이 인근에 있다. 청포도 시인으로 유명한 이육사 또한 퇴계 집안의 후손이다.

 

도산서원은 청량산과 낙동강이 만나는 언저리에 있다. 이 지역은 낙동정맥 뿌리 부분의 지세에 속해 있는데  백두대간과 크게 갈래를 이루는 곳으로 인근의 영주, 봉화 춘양 등은 험준한 산세의 바탕에서 깊은 산지 특유의 끈끈한 생명력의 체취가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태백산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줄기는 용케 산지를 지나며 그 산맥들을 갈라놓는다. 그 낙동강이 에굽어 내려오다 도산서원이 있는 의촌리 앞에 이루어진 좁은 평야지대를 휘감아 돌아가고 있다. 강과 만나는 산언저리를 따라 낙동강이 휘돌아가면서 수려한 산수 풍광을 이루고 있다. 퇴계는 낙향 후 도산서당을 세우면서 이 터를 물색했다.

 

 

▲ 도산서당

연혁
도산서원은 원래 도산 서당이 있던 곳인데 퇴계 사후 확장하여 현재의 서원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퇴계는 1557년(명종 12) 승려 법련(法蓮)에게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건립케 하였고 4년 후인 1561년 승려 정일(淨一)이 도산서당을 완공했다. 그리고 60세 때인 1560년에 낙향하여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전국에서 몰려온 제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농운정사와 역락서재(亦樂書齋)도 지었다.

평소 주자를 흠모한 퇴계는 이 터를 마련하면서 주자가 경영하던 중국의 백록동 서원을 연상 했던 것 같다. 무이구곡처럼 낙동강이 구비 구비 흐르고 청량산의 수려한 산세가 그 강물에 비추이는 이 곳 풍광은 백록동서원의 풍광을 연상케 할 만큼 수려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비록 규모는 소박하지만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좌우로는 동취병 서취병의 봉우리들이 둘러치고 있어서 ‘아늑한 느낌’이 든다.

1570년(선조 3) 퇴계선생이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도산서당 자리에  대 규모의 서원을 건립하기로 했다. 서당과 서원의 입지는 크기와 성격이 다르지만 퇴계의 족적을 지우기 어렵고 도산서당은 이미 전국적인 명소가 되어 있어서 결국 퇴계의 서당 영역을 보존한 채 그 뒤편으로 서원을 증축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1572년(선조 5) 상덕사(尙德祠)에 위패 봉안을 결정했고 2년 후인 1574년(선조7) 유림의 공의로 사당과 전교당, 동·서재를 짓고 1576년(선조9) 도산서원 완공되었을 때 선조는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을 사액하고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후 퇴계는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從祀)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을 도산서원에 종향(從享) 했다. 그리고 근대 들어 1969년 도산서원 일대를 사적 170호로 지정, 문화체육부 복원, 정리사업 시행 1970년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 건립되었다.  주차장에서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는 화강암을 다듬어 세운 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비문은 주자의 도가 동방으로 뻗쳤다는 뜻으로 이황이 수양한 이곳이 성리학의 도가 이어졌다는 뜻을 담고 있다.

 

 

▲ 도산서원 전교당

배치 및 공간구조
도산서원은 크게 앞쪽의 도산서당과 뒤에 놓인 서원으로 구분된다. 앞쪽의 도산서당 영역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퇴계가 기거하면서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제자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있다.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도산서당은 57년(명종 12)에 승려 법련(法蓮)이 주관하여 짓기 시작하여 61년에 완공하였으며 1969년에 보수하였다. 도산서당은 3칸의 단촐한 건물인데 퇴계가 쓰던 방 1칸과  부엌 1칸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1칸 마루로 되어 있다. 막돌초석 위에 네모기둥[方柱]을 세워, 납도리를 받친 민도리집 형식으로, 대청의 앞·뒤·옆면에는 창호를 달지 않고 개방하였으며 우측에 평상 형태로 놓인 마루는 폭이 좁은 널판들을 사이가 성기게 깐 툇마루가 특이한데 후일 학부모의 성금으로 늘려 지은 것이다. 서당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농운정사는 공부하는 방을 시습재(時習齋), 잠자는 방을 지숙료(止宿寮), 마루는 관란헌(觀欄軒)이라 불렀으며, 농운정사의 건물 전체 형태는 공부를 권장하는 뜻에서 ‘工’자로 지었다. 도산서당 맞은편에는 하고직사(下庫直舍)가 있는데, ㄷ자형 평면인 일반민가 형식으로 식생활을 맡아보던 곳이다.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안에 시사단(試士檀)이 섬처럼 놓여 있다. 본래의 터가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이게 되자 지금처럼 높이 단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그것은 1792년(정조 16년)에 정조가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사람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보인 장소이다. 그것은 최초로 지방에서 열린 과거 시험이었다. 

 

 

▲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

도산서원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서 진도문(進道門)을 지나 강학당 영역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그 곳에 이르면 정면에 유생들이 학문을 논하고 강의를 했던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 210호)이 놓여 있고 그  좌우에는 동서재가 놓여 있으며, 전교당 동쪽에는 박약재(博約齋)가 있다.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판은 선조가 하사한 조선조 명필 한석봉의 친필 글씨이다. 그리고 서측에는 서책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서 있고 동측에는 고직사가 있다. 1900년대 들어 성역화 하면서 관리사 등이 추가로 지어져 현재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도문 동쪽과 서쪽에는 광명실(光明室)이라는 서고가 있다. 퇴계가 소장하던 책들과 서간집, 여러 임금이 내려준 책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전교당 동쪽에는 퇴계 문집을 판각한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는데, 이 장판각에는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언행록 등의 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서원의 뒤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덕사(尙德祠)에는 퇴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을 돌아 나와 옥진각에는 퇴계선생의 행적과 지팡이, 매화등, 벼루, 투호, 지구의, 책자 등 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후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다.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