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 玉山書院
옥산서원 玉山書院
  • 나무신문
  • 승인 2014.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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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22-한국의 서원 ③ | 사적 제154호

 

▲ 지옥산을 바라보며 앉은 옥산서원

 

입지안강에서 영천으로 가다 우측으로 꺾여 들어가는 양편에는 점차 좁혀지는 산자락이 아늑히 감싸고 있다. 깊게 펼쳐진 평평한 들녘은 평온하고 둘러친 산세는 수려해서 이 지역에 들어서면 누구나 그 안온한 입지에 반해 주저앉아 살고 싶은 충동이 일 것 같다. 그 안쪽, 산자수명한 기운이 감도는 곳에 옥산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옥산서원은  산을 등지고 낙동정맥 줄기인 자옥산을 안산으로 바라보며 앉아 있다. 등진 산 능성이 너머에는 너른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고 서원 뒤로 올라가면 앞산인 자옥산 풍광이 시원스레 펼쳐 보인다.

옥산서원이 있는 이곳은 영천에서 안강읍을 거쳐 포항으로 가는 28번 호국로에서 깔때기처럼 좁아지는 형국이다. 동북쪽의 주산인 어래산(552)과 계곡 건너의 도덕산(703), 자옥산(557)이 둘러쳐 있는데 그 양편 산세 사이로 흐르는 계류가 어우러진 곳에 옥류를 끼고 등심대, 탁영대, 관어대, 영귀대 및 세심대 등의 반석이 있어서 옥산서원으로 연결되고, 계곡을 둘러싼 화개산, 자옥산, 무학산 및 도덕산 등과 더불어 사산오대의 경승을 이루는 곳이다.

 

▲ 강당에서 본 무변루

옥산서원 주면은 한가롭게 흐르는 개울과 띄엄띄엄 서 있는 시골집으로 소박한 모습이지만  앞을 흐르는 계류와 바위가 어우러진 주변 정취는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은 특별한 장소적 감각으로 다가온다. 건물은 평온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온 주변 산세와 들의 기운이 다 가득 모여진 가운데 그 곳의 온 기운을 홀로 다 누리는 모습이다. 그리고 서원 앞으로는 위쪽 먼 산골짜기로부터 흘러오는 작은 개울이 지난다. 그 개울은 휘돌아 가면서 운치 있는 멋을 풍긴다. 개울가에 돌출된 바위는 천전리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처럼 그 자체가 아주 빼어난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서원에서 서북쪽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이언적이 낙향 후 머물며 수학하던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이 있고 옥산서원 앞에는 독락당을 지나온 물길이 형산강을 향해 흐른다.

 

 

▲ 무변루에서 본 강당

연혁
경상북도 경주군(慶州郡) 안강읍(安康邑) 옥산리(玉山里)에 있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회재의 평소 장수지지(藏修之地)였던 자옥산(紫玉山) 아래에 창건된 서원이다.

 

이때 경주부윤 이제민은 서원 인근의 정혜사(定惠寺)와 두덕사(斗德寺) 및 사기(沙器), 수철(水鐵), 각점(各店)을 서원에 소속시켜 그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1573년 2월 서악서원에 봉안되어 있던 회재의 위판을 이안하고, 같은 해 12월 감사(監司) 김계휘(金繼輝)의 계달(啓達)로 사액(賜額)을 받아 1574년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또한 주향자인 회재가 1610년 동방오현(東方五賢)의 한 분으로 문묘(文廟)에 종사되자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즉 이언적이 이황과 함께 남인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으면서 퇴계를 배향하는 도산서원과 함께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인식되었다. 옥산서원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유생을 선발하였으며 경주지역 유림들의 공부를 위한 서적 등을 직접 출판하기도 했다.

옥산서원은 1967년 사적 제154호로 지정 되었으며, 서원에 보관 중인 『삼국사기(三國史記)』(9책)는 보물 제525호로 지정되었다. 주변에는 회재의 거처였던 독락당과 속사(屬寺)였던 정혜사의 터가 남아있는데, 독락당 어서각의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1책)·『李彦迪 手稿本 一括(이언적 수고본 일괄)』(13책) 은 보물 제586호로 지정되어 있다. 

 

 

▲ 마당에서 무변루로 오르는 계단

배치 및 공간구조
옥산서원은 사당 및 강당 등 동서재, 무변루 등 서원의 중심시설이 규범적 배치를 이루며 주 영역을 이루고 있고 그 외 장판각 및 전사청, 고직사 등 부속시설 영역이 우측에 산기슭 경사지형을 따라 횡으로 펼쳐져 있다. 

그 중 주영역 맨 뒤쪽에 위치한 체인묘는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으로 둘레 담으로 싸여 있다. 그 내부에는 이언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체인묘의 제인(體仁)은 “어질고 착한 일은 실천에 옮긴다”는 말로 성리학에서 주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체인묘 주변에는 옥산서원이 사찰 터에 세워졌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앞에 놓인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초익공 팔작지붕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이며, 왼쪽편인 남쪽 방은 양진재(兩進齋)이고, 오른편의 북쪽방은 해립제(偕立齋)이다. 구인당의 구인은 성현의 학문이 다만 인을 구하는데 있다는 회재 성리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사상으로, 회재의 저서 구인록에서 취한 것이다. 구인당의 좌측 협실인 양진재의 양진(兩進)은  명(明)과 성(誠) 둘을 갖추어 전진함을 말하는 것으로 명은 도덕을 밝힌다는 뜻이고, 성은 의지를 성실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측 협실인 해립제(偕立齋)의 해립(偕立)은 경의해립 경의립제(敬義偕立), 즉 경건한 마음가짐과 신의로써 사물에 대처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경의(敬義)와 명성(明誠)은 성리학의 으뜸 되는 뜻이다. 구인당은 현종5년1839년 불에 타버린 것을 다시 복구한 건물로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 (玉山書院)’의 편액(扁額) 글씨는 원래 이산해(李山海)의 글씨였으나, 구인당을 새로 지으면서 김정희(金正喜)가 다시 썼다.

 

 

▲ 서원앞을 흐르는 자계

구인당 전면 좌우에는 유생들이 거처인 민구재(敏求齋)와 은수재(誾修齋)가 대칭으로 놓여 있다. 두 건물 모두 정면 5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동재인 민구(敏求)는 인(仁)을 구함에 민첩해야 한다. 호고민이구지(好古敏以求之)에서 따온 것이며, 서재인 암수재(闇修齋)의 암수(闇修)는 주자의 가만히 고요히 자수한다. 암연자수(闇然自修)에서 따온 것이다. 강당과 묘우사이에는 회재의 신도비(神道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1호)가 있는 비각이 있으며, 이외에도 경각-어서각(經閣-御書閣), 문집판각(文集版閣),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 포사, 마구간 등의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유물전시관인 ‘청분각(淸芬閣)’이 있었지만, 2010년에 옥산서원유물전시관을 지으면서 헐어버리고 모든 유물을 신축한 유물전시관에 보관하고 있다. 옥산서원에 가면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체취가 고스란히 풍겨온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