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 道東書院
도동서원 道東書院
  • 나무신문
  • 승인 2014.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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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21 한국의 서원 ②

 

▲ 다림재에서 본 도동서원 전경

입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求智面) 도동리(道東里)에 있는 도동서원은 대니산(戴尼山)이 낙동강과 만나 산수풍광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강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다. 대니산 동측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그 곳은 남북으로 연결된 평지로 이어져 있어서 도회지로 변해갈 것처럼 활달한 모습이지만 대니산 서쪽에 위치한 이 곳 낙동강 강변은 아직도 깊은 자연부락을 이루고 있어 과거 조선시대 문화와 서원의 체취가 간직되어 있다. 달성에서 도동리로 넘어가는 마루 고개인 다림재에서 내려다보면 낙동강이 흐르는 도동서원 전경이 어우러진 풍광이 그림처럼 바라보인다. 그리고 동측으로 다림재가 잇는 산자락과 서측의  뒷골 산자락이 좌우에서 감싸고 있어 별천지 같은 분위기를 띠며 과거 시대의 체취가 간직된 느낌을 띤다.

 

도동서원이 위치한 도동리는 고령JC에서 창녕으로 내려간 낙동강 강변에 있다. 서원의 서측에는 멀리 가야산(1430)과 미숭산(757),  좌랑봉-시리봉이 뻗어 있고 우측으로는 대구에서 남쪽으로 창녕과 청도 사이에 뻗친 용지봉(634) 주암산(846) 최정산(905), 우미산, 홍두께산 천왕산(619)으로 뻗친 산줄기가 둘러친 사이에 있다. 그리고 위쪽에서는 합천호 물줄기가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안림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대니산(戴尼山)의 본래 이름은 태리산(台離山) 또는 제산(梯山)이라고 불렸는데 한원당 선생이 이 산 아래 들어와 살게 되면서 사람들이 대니산(戴尼山)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공자(孔子)는 짱구여서 공구(孔丘)라고도 했고, 니구산(尼丘山)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공니(孔尼)라고도 불렀는데, 대니산(戴尼山)은 공자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높여 받드는 산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

 

 

▲ 도동서원 사당

연혁
도동서원은 1604년(선조 37)에 한원당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배향해 세운 서원으로서 소수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과 함께 조선 5대 서원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김깅필은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배되고,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당한 사림파의 문인이다. 퇴계 이황은 한원당을 가리켜 근세도학지종이라 칭송했는데 우리나라 도학의 대종(大宗) 즉 도학의 종결자란 의미를 갖는다.

 

 

한원당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1575년(선조 8년)에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문경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리고 광해군 2년(1610)에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할 인물로 꼽힌 동국5현(東國五賢) 가운데 수현(首賢)이었던 만큼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어 이 서원의 의미를 각별하게 한다.  

 

 

▲ 도동서원 사당 앞 계단부분

김굉필을 향사하는 최초의 서원은 그가 죽은 뒤 60여 년 후인 1565년(명종 20)에 적소(謫所)인 전라도 순천에 건립된 옥천서원(玉川書院)인데, 이후 16세기 중반 서원이 전국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할 때 그의 고향인 현풍에서도 김굉필을 향사하는 서원 건립이 추진되어 1568년(선조원년) 비슬산 계곡에 쌍계서원(雙溪書院)이 건립되었다. 이 서원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탓에 건립과정이나 운영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은 알 수 없다. 다만 창건 당시 문적(文籍)에 의하면 다른 여타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향중사림(鄕中士林) 뿐만이 아니라 감사를 비롯한 지방관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1573년(선조 6) 경상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쌍계(雙溪)>의 사액(賜額)과 함께 서적을 하사받았다.

 

그 쌍계서원은 임진왜난(壬辰倭亂)으로 불에 타 폐허가 되었지만 당시 향촌사회의 피폐한 사정으로 10여 년 동안 중건되지 못하다가, 한원당의 외증손이자 예학에 밝았던 한강(한강) 정구(1543~1620)와 지방유림의 공의로 1604년(선조 37) 현풍현 오설리 송림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하면서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서원명을 보로(甫老)로 개명(改名)하였다. 그리고 그 후 같은 해 도내 유생들의 계청(啓請)으로 <도동(道東)>으로 재사액(再賜額)되었다.

 

1607(선조40년 선조가 직접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도동(道東)의 뜻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로 도학이 한원당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기리는 이름이다. 1678년(숙종 4)에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했다.

 

경내 건축물 중 1963년 1월21일 강당ㆍ사당과 이에 딸린 <도동서원강당사당부장원(道東書院講堂祠堂附墻垣)>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1963.01.21.)되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토담으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07년 10월 10일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이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어 보존ㆍ관리되고 있다.

 

 

▲ 도동서원 앞 좌측조망

배치
경내의 건물로는 김굉필과 정구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祠堂), 원내의 여러 행사 및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한 중정당(中正堂), 유생들이 기거하던 거인재(居仁齋)·거의재(居義齋) 외에 수월루(水月樓)·환주문(喚主門)·내삼문(內三門)·장판각(藏板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는데 일부 건축물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보존되고 있다.

 

도동서원은 건물 배치는 거의 완벽한 대칭 구조를 띠고 있는데 소수서원으로부터 시작된 서원의 배치 규범을 확립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후로 형성된 경사지형에 높낮이에 따른 위계를 부여하고 위계가 가장 높은 건물을 맨 위쪽에 배치하였는데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대문에서부터 사당까지 이어진  곧바른 축선상의 맨 뒤에 놓여 있다.

 

도동서원은 건립에 관한 일화가 전해진다. 서원을 건립할 때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앞다퉈 재물을 보내 왔다. 김굉필의 서원 건립에 동참 하지 않으면 선비가 아니다 할 정도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박하게 지으려 한 일인데 성금이 넘쳐서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건물에는 소박한 느낌을 띠도록 하고 강당 및 사당에 오르는 기단과 계단을 매우 품격 높게 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성금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