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소수서원
  • 나무신문
  • 승인 2014.08.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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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20 -한국의 서원 1

 

▲ 소수서원 영내 부분

입지
풍기읍에서 부석사 쪽으로 가다 길 오른편 아름드리 노송숲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다. 소수서원은 소백산으로부터 뻗쳐 내려온 산세를 배경으로 앞으로는 죽계천이 반원형으로 휘감아 흐르는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죽계천은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순흥, 풍기, 영주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소수서원이 위치한 이 곳은 백두대간 줄기가 소백산을 지나 태백산으로 들어서는 길목으로서 서원의 터는 거북이가 알을 품는 영귀포란형 명당으로 꼽히는데, 주산인 영귀봉은 소백산에서부터 엉금엉금 기어 내려온 형국이다. 지금은 차량이 빈번한 포장도로가 지나고 있어서 옛 입지의 느낌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뒤로 지나는 백두대간 산세와 죽계천 건너의 나즈막한 산세가 개울과 어우러진 빼어난 산수 풍광을 이루었을 것 같다. 

서원의 입지는 중국에서의 초기 생성단계부터  배향 인물의 연고지로서 풍광이 수려한 곳을 택하였는데 이 곳은 그러한 조건에 딱 부합되었다. 배향자의 연고지에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그 체취가 서린 곳에서 선현의 학덕을 본받아 스스로를 수양 하려는 의미이고 서원의 입지를 고를 때 자연 풍광이 수려한 곳을 택하려 한 것은 자연 안에서 심신을 맑게 가지려 함이다.

 

 

▲ 소수서원 경렴정

연혁
소수서원은 1543년(중종 36년) 37년(1542) 신재(愼齋) 주세붕이 순응에 안향을 배향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순흥은 원래 이 고장의 중심이었으나 신재가 부임할 당시에는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 발각된 ‘정축지변’으로 폐부돼 풍기군에 병합돼 있었다.

평소 회헌 안향 선생을 흠모해 오던 주세붕은 중종36년(1541)5월 풍기군수에 부임하자마자 회헌의 고향인 순흥을 찾았다. 그리고 부임하는 길로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水寺址)에 들렀다.

 

이 터는 원래 신라시대 창건된 숙수사가 있던 곳인데 지금도 옛 당간지주가 서 있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회헌은 소년시절 이 곳을 자주 찾아와 글을 읽었다. 그러나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 할 때는 불타 없어지고 터만 남았을 때다. 신재는 이곳을 거닐면서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하고 서원창건 계획도 세었다.

이듬해(중종37년) 8월15일 공사를 시작하여 땅을 파다보니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와서,  제기와 서책 등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공사를 시작한 그 이듬해(중종38년) 사당과  강당 등 30여 칸이 완성되었다. 신재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의 이름을 본따서 서원 이름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했다.

이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조정에 사액을 청하자 이에 명종은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과 아울러 토지와 노비, 서책 등을 하사함으로써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고 사립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소수서원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란 뜻을 담고 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 입학정원이 10명이었으나 사액을 받은후 30명으로 늘었다.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유생들이었다. 그러나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에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면 퇴원당했다고 한다.

 

소수서원은 건립 후 353년 동안 무려 4천여 명에 달하는 인재들을 배출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사회 곳곳에서 조선의 지도자가 됐다. 특히 퇴계는 소수서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이들 제자들은 후에 도산서원을 건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퇴계는 어린시절 영주에서 학문을 수학했고 결혼도 했으며, 경제적 기반과 제자들도 영주에 있었다.

 

 

▲ 소수서원 당간지주

배치 및 공간구조
널따란 주차장을 지나 시원스레 솟은 노송숲 사이로 지나다 보면 우측에 옛 절터를 알리는  당간지주가 서 있고 그 앞에는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죽계천이 고요히 흐른다. 개울 옆에는 개울쪽으로 기울어진 몇 그루의 큰 소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그리고 정문 우측에 있는 경렴정은 노송 및 개울과 함께 그림처럼 어우러져서 정취를 돋운다.

 

서원의 기능은 크게 2가지인데 첫째는 스승을 기리고자 제사를 드리는 ‘제향기능’이고, 둘째는 학문을 진작시키고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기능’이다. 그리고 서원내 시설은 선현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학문을 배우고 논하는 강학당, 학생들이 기숙하는 동서 재(齋), 전사청, 고직사 등이 기본 시설이다. 그런데 그 제도가 정착되면서 외삼문으로부터 루, 강당 사당 등의 주요 시설들을 일직선상에 놓이게 하는 등 배치에 질서를 갖추며 규범화 되었다. 소수서원도 이런 제향기능과 교육기능을 두루 갖추고 있는데 최초로 건립할 당시에는 서원의 형식 규범이 정립되기 이전이어서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의 배치 질서가 명료하게 느껴지지 않고 자유로운 구성을 띠고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당이 있고 그 좌측에 배행한 선현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 있다. 사당에는 문성공 안향을 비롯하여 안보, 안축, 주세붕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사당 뒤에는 제기등을 보관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 소수서원경자바위

사당과 강당 사이 뒤편에는 장서각과 영정각이 앞뒤로 서 있는데, 장서각에는 서책이 보관되어 있고 영정각에는 회헌, 신재, 퇴계 선생 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장서각과 영정각 우측, 강학당 뒤에는 가르치는 스승이 거처하는 직방재와 일신재가 있다. 그리고 그 우측 조금 뒤에 학구재가 놓여 있으며 우측 끝, 개울가에는 지락개가 있다. 학구재의 배치는 스승이 거하는 빅방재와 일신재와 위계를 고려한 것이다.

 

서원 옆 죽계천변에는 ‘경(敬)’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주세붕이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첫 글자를 새긴 것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유교의 가르침을 잊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설이 하나 서려있다. ‘정축지변’으로 이곳 죽계천에 수장된 많은 영혼들이 밤마다 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바위에 새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해 원혼을 달래니 그로부터 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그리고 당간지주 건너에 있는 취한대는 서원 원생들이 풍광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여가를 즐기던 정자이다.

 

 

▲ 소수서원 죽계천과 취한대

서원의 후면 담장 뒤로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사가 연이어 있고 그 뒤로 새로 조성된 사료전시관과, 고직사 충효교육관이 있다. 서원의 담장 너머에는 야트막한 구릉이 감싸고 있는데 그 곳에 비보림으로 조성된 노송 숲이 우거져 있어 주변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 곳에 오면 언제나 한가로이 자연 정취 속에 옛 성현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