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慶熙宮
경희궁 慶熙宮
  • 나무신문
  • 승인 2014.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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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19 - 한국의 궁궐 5/5

 

▲ 승정전 일우

입지
경희궁은 내사산 가운데 한양의 서쪽을 감싸는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다. 조선 건국 후 새 도읍지를 물색할 때 장단, 계룡산, 무악, 안산 등 여러 곳이 물망에 올랐었는데 태조가 강력히 주장하여 현재의 백악을 주산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새 왕조의 면모를 드러낼 궁궐을 지을 때 현재대로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았는데 그 때도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었다. 인왕산은 백악에 비해 산세가 옆으로 길게 펼쳐져 있어 안정감이 든다. 하지만 인왕산을 주산으로 할 경우 정면이 동향하는 문제가 생길뿐 아니라 군자남면이라는 원칙에 어긋나게 되므로 배제 되었다.

인왕산은 한북정맥에 위치한 북한산으로부터 분리되어 별도의 산세를 이루고 있는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준수한 암봉이 커다란 기세를 뿜으며 수려한 풍광을 이루고 있으며 햇살이 맑게 드는 곳이다. 그리고 백악산과 사이에 탕춘대성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지세가 험준해 천연의 방벽 역할을 한다.

 

▲ 편전 일우

 

연혁경희궁은 광해군 8년(1616), 세워진 궁궐로 조선후기에 대표적인 이궁으로 사용되었는데 원래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원종(1580〜1619)의 집터였다. 부사 신경희가 그 색문동 일대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을 하여 소문이 돌게 되었는데 역모를 의식해서인지 광해군이 정원군(원종으로 추대)의 집을 포함한 수백호의 여염집을 이주시키고 서둘러 궁궐을 지었다. 지금도 태령전 뒤쪽으로 가면 그 말의 진원지가 된 커다란 천연 암반의 왕바위가 있다.

 

이 궁은 光海君에 의해 세워진 뒤 인조(仁組),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組), 정조(正組), 순조(純組), 헌종(憲宗), 철종(哲宗) 등 10代에 걸쳐 많은 임금이 드셨는데 특히 현종과 숙종은 거의 전 생애를 이곳에서 만기친람(萬機親覽)하였다. 그리고 또한 영조도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 때문인지 특이하게 영조 어진을 모신 태령전이라는 전각이 놓여 있다. 경종, 영조, 정조, 헌종 이 이곳에서 즉위하였고 순조는 이곳에서 승하했다. 또한 숙종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생을 마쳤다.

경희궁의 명칭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이었으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 변형되어 현재 규모로 축소되었다. 그 때 수정전은 일본인 자녀의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3월에 남산 기슭에 있는 일본인 사찰 조계사에 매각되었다. 경희궁 부속 건물로는 동쪽에 정침인 융복전, 서쪽에 왕후의 침전인 회상전이 있었고 융복전 동쪽에는 대비전인 장락전이 있었으며 그 외에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 등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고 나머지 건물들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옮겨져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내부가 불교 의식 거행에 알맞게 변형되어 있으며,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정조 때 만들어진 경희궁지(慶熙宮志)에는 경희궁의 규모와 배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궁성의 둘레는 6,600척이며 사방에 5개의 문을 두어 동쪽에 정문인 흥화문과 왼쪽에 흥원문, 남문 개양문, 서문 숭의문, 북문 무덕문이 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경희궁은 복원전에 공터로 남아 있었는데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었는데 1985년부터 5차례의 발굴조사 시행 후 그를 토대로 1988년부터 6년에 걸쳐 복원공사를 해서 2002년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의 복원을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되었다. 숭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구조로서 창덕궁 명정전과 함께 조선 후기 궁궐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터 숭정전 뒤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 태령전

배치 및 구성
현재 경희궁은 원래 지어진 궁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지금은  정전 일곽만을 볼 수 있는데 본래는 주변의 서울역사박물관과 기상청, 서울특별시 교육청, 성곡미술관 등에 이르기까지 너른 영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초 경희궁의 진입축은 동쪽에서 들어서서 꺾여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광화문 구세군 본부 앞 도로가에 원래 정문터의 표식이 세워져 있다. 서궐도가 남아 있어 원래 경희궁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역사박물관과 옛 서울고 자리에 전시관이 들어서 있어 정궁 일곽만 남아 있어서 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춰 복원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좁은 영역이나마 궁궐의 핵심 영역인 정전과 편전 일곽이 남아 있어 엄숙한 궁궐의 법도를 자아낸다. 숭정 전 안에는 영상이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왕의 통치를 상징하는 일월오악도가 둘러쳐 있는데, 오악은 우리나라의 동서남북과 중안의 다섯 산을 상징하고 이는 곧 국토를 의미하는데, 동악은 금강산, 서악은 묘향산, 북악은 백두산 남악은 지리산, 그리고 중악은 북한산에 해당된다. 하지만 현재의 경희궁은 여타 궁궐의 주요 기능을 담당하는 시설들이 없어 상징적인 인상으로 다가온다.

 

 

▲ 승정전 내부

경희궁 정전 월대에는 품계속이 도열하듯 서 있다. 품계석은 조선 초기에는 없었던 것인데 위계질서가 문란해지자 정조 6년(1782)에 어명으로 설치한 것인데 행사가 거행될 때면 좌측에 문반, 우측에는 무반이 각자 위계에 맞는 품계석 앞에 도열하도록 했다. 정전 앞의 너른 월대의 뜰을 조정이라 하는데 그 말은 조회가 열리던 마당이란 뜻을 지닌다. 그리고 임금께 절하라는 “배(拜)~” 라는 말이 떨어지면  중앙의 삼도를 중심으로 문반, 무반이 서로 마주보고 절을 했다. 정전 행각은 지형차가 커서 바닥이 단차 많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는 빈 상태이지만 그 시대에는 필요에 따라 칸을 막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마패를 관장하는 상서원이나 호휘청, 정청 등을 두기도 했다.

 

그리고 숭정전 뒤에는 편전인 자정전이 놓여 있는데 전면에 놓인 숭정문과 축이 어긋나 있어 위엄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 자정전 우측에는 고저차가 큰 지형위에 설치한 담장이 편전 일곽을 아늑히 감싸고 있다. 신문로에서 들어서는 현재의 흥화문은 신라 호텔 정문으로 쓰이던 것을 이전한 것이다.
경희궁 동측 언덕 너머 아래쪽에 역사박

물관이 있으며 좌측에는 서울교육청과 기상대가 있고 궁궐 뒤에는 사직공원 앞으로 지나는 사직로와 사직터널이 있는데 그 터널은 인왕산에서 이어지는 지형상 주맥을 관통하며 지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경희궁은 궁궐로서의 본래 면모를 잃은 터에 정전 월대에서 종종 대형 야외 무대극을 공연하고 있어 궁궐의 면모에 지장이 되기도 한다. 인왕산 자락의 자연 기운이 감돌던 경희궁이 지금은 도시 깊숙한 곳에 입지하는 형국이 되어 세월 따라 변하는 세상 풍경을 돌아보게 한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사적 제271호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