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德壽宮 (한국의 궁궐 4/5)
덕수궁 德壽宮 (한국의 궁궐 4/5)
  • 나무신문
  • 승인 2014.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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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18

 

▲ 덕수궁 배치도

입지
덕수궁의 입지는 서울의 다른 궁궐들과 다른 특징을 띠고 있다. 다른 곳들이 모두 한양의 골격을 형성하는 사사산의 지세와 연관되어 있는 반면 이 곳은 그러한 연관성이 갖춰져 있지 않고 전체적으로 평평한 편이다. 한국전통건축은 전통적으로 입지 형국을 중시했기 때문에 산세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녀 왔다.

이곳의 입지 조건이 그처럼 평이한데는 원래 집터의 조건이 도성 안의 평범한 일반 가옥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즉 가옥으로서 넉넉하고 좋은 터의 조건을 갖춘 곳이지만 궁궐의 터의 입지 조건을 갖춘 곳은 아니었다. 그래도 운종가 같은 완전한 평지와는 달리 서측 도성 성곽 언저리에 약간의 구릉이 있고 북쪽으로도 구릉이 있어 원근 산세와 어우러지는 풍광을 띨 수 있었다.

 

 

▲ 덕수궁 전경

덕수궁은 그처럼 사사산과의 지형적 연관성은 적은데 비해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과 경복궁을 잇는 중심 가로 체계와 밀접성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후일 덕수궁이 대한제국의 정궁 역할을 할 때 덕수궁을 중심으로 주변의 외국 공관과 유기적 연관성을 띠게 되고 도시가로 조직이 새롭게 짜여지는 점에서 조선 말기 자체적인 근대 도시 형성의지가 대두되기도 한다.

 

 

연혁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가의 사저였는데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몽진하였다가 26년(1593) 10월에 환도했을 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불타 없어져 이곳에 들어가 임시로 행궁을 삼게 되어 궁궐이 되었다. 선조는 환도(還都)후 바로 이곳을 궁궐로 삼아 정사(政事)를 보았는데 시설이 부족해 근처에 있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그 후 선조는 40년(1607) 4월 행궁 북쪽에 별전을 건립하였고 선조 41년(1608)에 행궁의 정침에서 서거하자 서청에서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3년(1611) 10월 창덕궁으로 이어 하고 이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광해군은 3년(1611) 12월에 경운궁으로 환어하였다가 광해군 7년(1615) 4월 창덕궁으로 이어하고 12년(1620)10월 경운궁을 수리하였다. 그런데 1623년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후 고종이 재위 33년(1896) 2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아관파천’ 사건이 있은 후 1897년 2월 이 궁으로 이어하고 다시 경운궁이라 하면서 규모를 넓혔다. 그리고 조선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바꿨다.

고종 33년(1896) 9월에는 경복궁 집옥재에 봉안하던 열성어진을 경운궁에 옮겨 봉안하였으며 1897년 선원전, 함령전, 보문각을 조영하고 광무 4년(1900)궁장을 세웠다.

 

 

▲ 석어당 일우

그리고 광무 6년(1902)에 중화전을 지었으나 광무 8년(1904)년 불에 타서 광무 10년(1906)년에 다시 지었다. 중화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 구조로서 밖으로 뻗쳐 나온 부재가 가늘고 약해 보이며 곡선이 큰데 이 것은 조선 후기 목조건축 양식의 특징을 보이는 것이다. 중화전 조정에는 품계석을 놓고 행각을 둘렀으며 정전의 정문인 중화문을 두었다. 그런데 그 중건 과정에서 석조전이 지어지고 정문의 위치가 바뀌게 되었는데 원래 정문이던 남쪽의 인화문 대신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광무 11년 7월(1907) 제위를 순종에게 넘기자 순종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그 4년 뒤인 1911년 함령전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중화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흠문각 등이 소실되어 곧 중화전을 제외한 여러 건물들을 중건하였다.

 

현재 경운궁에는 중화전, 중화문, 함녕전과 그 행각, 석어당, 석조전, 정관헌, 대한문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 석조전 별관

배치 및 구성
덕수궁의 형성 과정은 연혁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엄격한 법식을 갖추며 계획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상황에서 임시 궁궐로 쓰기 시작한 다음 정치적 상황에 따라 차츰 궁궐의 격식을 갖추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원래 월산대군 사저로서의 입지적 성격이 이 그 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덕수궁의 구조는 처음 임시 거처로 쓰던 건물이 뿌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선조와 광해군 등이 쓰던 건물들은 지금 남아 있는 석어당 즉조당 등 원래 사저 위치에 지은 건물들이고 그 전면의 중화전은 후에 갖춰진 것으로 1892년 중화전 일곽이 형성되기 전에는 월산 대군의 사저와 같은 면모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궁궐과 대군 사저의 입지는 격과 규모에서 비교될 수 없기에 그 보완적 증설 과정이 결국 궁궐로서의 품격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되었다. 그리고 후에 지어진 석조전 영역은 궁궐의 이미지를 특이하게 이루어지게 했다.

덕수궁은 처음부터 전체 영역을 확정하고 계획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전란에 궁궐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진 상황에서 복원을 하기까지 왕의 임시 거처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넉넉한 터에 궁장을 둘러 반듯하게 조영된 것이 아니고 특별한 정세 상황과 왕이 머무는 기간에 따라 필요한 시설들을 그때그때 갖춰 나가는 형태로 조성되었다. 그래서 터가 협소한 정전 일곽도 3조3문의 규범적 질서를 반듯하게 갖추지 못한 채 부분적으로 조성하는 형태가 되었다.

 

 

▲ 석조전 별관

덕수궁은 구한 말 본격적인 궁궐로 사용하면서 궁역을 확장하여 지금의 미국 대사관과 구 경기여고 자리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현재보다 매우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 영역이 반듯하게 구획되어 있지 않고 산재한 모습인데, 반듯하게 갖춰져야 할 궁궐이 그러한 복잡성을 띤 데에는 구한말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고종이 경복궁을 포기하고 덕수궁으로 이어한데는 주변에 외교적으로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외국 공사관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것이 아관파천 등 역사적 사건이 생기게 된 배경이 되기도 한다. 즉 개화기 경운궁 주변 정동 일대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는데 궁역의 일부를 부지로 매각하기도 하여 덕수궁 영역 내에 끼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한 입지 상황에 따라 다른 한편으론 덕수궁 화재 사건 등으로 임시 거처로 쓰이던 중명전 에서 을사늑약 등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만 덕수궁은 한양도성의 내부에서 가로 체계와 평지성의 공간 구조 그리고 인근의 여러 공사관들과의 관계상 원활성 등이 효과적으로 여겨질 수 있는 측면도 있는데, 그것이 근대적 도시 구축의 한 단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 석조전과 중화전

현재의 덕수궁은 전통 건축과 서양식 건물이 혼재되고 각각의 영역이 뚜렷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다소 산만하고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인 배치와 공간 구조의 짜임새가 반듯함을 갖지 못해 궁궐로서의 위엄이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덕수궁은 조선말기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역사를 증언하는 증표가 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중화전 일우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5-1/사적 제 124호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