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남동구에 가면 소래가 있다. 소래포구로 더 잘 알려진 소래, 그렇다면 소래가 무슨 뜻일까?
소래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소래의 지형이 소라를 닮았다는 설이다. 뾰족하다, 좁다, 가늘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우리말 ‘솔다’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소래포구 주변에는 소래산 오봉산 등 작은 산들이 있는데 산봉우리가 뾰족해서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또 소래냇가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솔내’라고 부르던 것이 음이 변해 소래가 됐다는 설도 있다.
소래는 원래 한적한 바닷가였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소래에 염전이 들어섰다. 이후 일제는 소금을 생산하고 운반하는 염부와 소금을 수송하기 위해 나룻배 한 척을 운행했는데 그 나룻배가 소래에 배를 대면서 포구가 생긴 것이다.
이후 1960년 경 17명이 최초로 어업을 시작했던 소래포구는 지금은 연평균 300만 명의 인구가 몰리는 관광명소가 됐다.
소래 여행의 출발지점은 수인선 소래포구역이다. 수인선은 1995년에 폐선 됐지만 지금은 전철 운행 구간을 새로 만들어 전철을 운행하고 있다. 지하철 4호선 종점인 오이도역에 내리면 수인선 전철로 갈아탈 수 있다.
소래포구역에서 소래역사관까지 525m, 소래역사관 앞 길을 건너면 소래철교가 나오고 소래철교 바로 옆이 소래포구어시장이다. 소래포구어시장에서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소래습지생태공원이 있다. 하루 여행 동선 및 이동 거리가 자세하게 나와 있다.
소래역사관 건물에 수원과 인천을 오가던 협궤열차의 축소 모형이 있어 옛 수인선 열차 객실을 구경할 수 있다. 소래역사관 건물 밖에는 실제로 수인선 열차를 움직였던 열차의 기관차가 있다.
소래역사관 앞 수인선 열차 기관차를 보고 길을 건너면 바로 장도포대지다. 장도포대지는 조선시대 고종16년(1879년)에 인천으로 진입하는 외국선박을 막기 위해 화도진을 구축할 당시에 만들어졌다.
수인선은 인천의 송도와 경기도 수원 사이에 놓였던 협궤철도다. 1937년 8월 개통된 이후 경기 내륙지방으로 쌀과 소금 해산물 등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1995년에 폐선 되었다. 2012년 새로운 수인선 전철이 개통되었다.
소래철교를 건넜다 다시 돌아왔다. 소래에 가면 으레 소래철교 왕복 걷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시장에서 큰길을 따라 가다 보면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 소래습지생태공원으로 들어가는 굴다리를 만난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흙길이 나온다.
갈매기가 앉아 있는 갯골이 보인다. 갯벌에는 염생식물로 보이는 것들이 붉게 자랐다. 그 위에 배들이 배를 드러내놓고 있다. 간혹 갈매기가 날았다 앉았다 한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은 옛날 소래염전이었던 곳이다. 소래염전은 1934년 처음으로 소금을 생산했다. 소래갯벌로 들어오는 바닷물을 이용하여 소금을 생산했다. 1993년 문을 닫았다.
소래습지생태공원은 갯골과 갯벌, 갯벌동식물 등이 있고 갯벌체험도 할 수 있다. 또 재래방식으로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을 일부 복원해서 소금생산체험학습장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생태공원 건물 전망대에 올라가면 생태공원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염전, 습지, 풍차, 갯벌 등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름답다. 갯벌체험을 하는 아이들과 엄마 아빠들이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