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昌慶宮
창경궁 昌慶宮
  • 나무신문
  • 승인 2014.07.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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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17 - 한국의 궁궐 3/5

 

▲ 창덕궁 정전 일우 전경

입지
창경궁은 창덕궁과 같은 지형 흐름상에 놓여 있다. 매봉에서 뻗쳐 내려온 그 지형은 창덕궁과 청경궁 영역을 구분 지으며 종묘로 이어져 있다. 창덕궁이 남향한 것과 달리 창경궁은 정전 등 주요 건물이 동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동쪽으로 경사진 지형에 따른 것이다. 창경궁과 종묘로 연결되는 지형은 일제강점기 도로를 내어 나뉘어져서 지형 흐름이 끊기고 말았는데 터널로 하여 지형을 복원할 목적으로 공사 중에 있다.

 

 

▲ 명정전 일우

연혁
조선이 이미 경복궁과 창덕궁이 있던 상황에서 창경궁을 짓게 된 것은 새로운 궁궐의 창건 목적보다 창덕궁 내에서 필요한 시설들을 증설할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왕실 가족이 늘어나고 또 궁궐에서 활동하는 인원이 늘어나면서 창덕궁은 이를 수용하기에는 비좁게 되었다. 그리하여 창덕궁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새로 지은 궁궐이 창경궁이다.

 

창경궁의 조성 계기는 세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은 창덕궁 옆에 수강궁이라는 건물을 지어 상왕인 태종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했다. 태종이 승하한 후로는 따로 쓰임이 없어서 이 궁의 존재가 미미하였고 차츰 퇴락되어갔는데 그 후 성종 13년(1482) 당시 생존하고 있던 세조비(世組妃) 정희왕후 윤씨, 어머니인 덕종비(德宗妃) 소혜왕후 한씨, 양모(養母)인 예종(睿宗)의 비 안순왕후 한씨를 위하여 수강궁 터에다 창경궁을 건조(建造)하기로 하고 수리도감(修理圖鑑)을 설치하였다. 수리하기에 앞서 옛터를 그대로 두고 보수만 하는 것이 좋은지 또는 모두 철거하고 다시 지을 것인가를 상의하였던바. 궁실(宮室)은 당비(當卑)하고 남향해야 하며 사용하는데 편리하고 그리 높거나 크지 않아야 한다고해, 결국 새로운 궁궐을 이룩하는 공역(工役)이 시작되었다. 그해 3월 세조비가 승하하여 일시 중단하였다가 성종15년(1584)에 명정전, 문정전, 환경전, 경춘전, 인양전, 통명전, 양화당, 여휘당, 충성각 등을 건축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서로 독립된 궁궐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합쳐서 하나의 궁궐로 사용되었다.

 

 

▲ 통명전 일우

창경궁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예비 궁궐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지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체적인 궁궐의 골격도 엄격한 궁제(宮制)에 얽매이지 않고 현지 상황에 적절히 대응해 조성하였다. 즉 궁궐로서의 격식을 갖추기 위해서 정전 일곽을 규범적으로 조성했지만 간소화해서 정전에 이르는 과정은 두 개의 문을 지나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터의 조건상 동쪽 앞 능선까지의 길이가 길지 않아서 일직선 축에 3개의 문을 두는 제후 3문의 엄격한 법식의 적용이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전인 명정전의 규모도 단층으로 간소화 되었다.

 

창경궁은 그처럼 단독 궁궐로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창덕궁의 늘어난 살림살이에 대처하기 위해 짓기 시작했고 조선 말기까지 궁궐의 행사나 살림공간으로 주로 이용되었다. 왕들은 창덕궁에서 멀지 않은 이곳으로 들면서 언덕을 넘어 벗어나는 기분으로서 산책을 나가듯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은퇴 후의 예비공간으로도 활용될 수 있었는데 그러한 건립 배경이 그만의 특성으로 나타나 있다.

 

 

▲ 명정전 뒤 행랑

배치 및 공간구조
창경궁의 영역은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명정전 문정전 숭문당을 중심으로 한 외전과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 환경전, 경춘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그리고 풍기대가 설치된 야트막한 야산을 넘어 대 소춘당지를 중심으로 한 원유 공간이 그것이다.

 

창경궁 명정전은 왕궁의 정전으로서는 유일하게 동향하고 있다. 이는 풍수지리상 동향하면 배산임수의 명당 조건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논란 끝에 선택한 결과였다. 즉 남향하면 동서로 경사진 언덕에 비스듬히 앉게 되어 정전 일곽의 반듯한 배치를 이루기 어려운데 비해 동향함으로서 창덕궁과 접한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춘당지에서 시작해 옥천교 밑으로 흐르는 물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 명정전 월대와 행각

창경궁은 정전인 명정전의 규모가 경복궁과 창덕궁에 비해 외소해 보인다. 그러나 건축물의 규모는 작지만 회랑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엄숙한 위엄을 갖추고 건물의 향이 남향과 동향으로 혼재되어 있어 활달하고 변화감 있는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침전영역에는 월대가 꾸며진 중전인 통명전이 있고 우측에는 후궁의 거처로 쓰였던 건물들인 양화당과 영춘헌이 놓여 있다. 그리고 통명전 앞쪽에는 경춘전, 함춘원이 동향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전각들은 주로 대비전으로 쓰였는데 통명전과 배치상의 위계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일관된 통일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통명전 뒤 언덕에는 풍항기, 측위기 등 기후 관측기구 들이 놓여 있고 언덕 너머는 후원으로 춘당지와 내농포 등이 있었다. 그 곳에 이르면 외곽 숲 속의 아연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창경궁은 역대 대비와 왕세손 등의 일상적 추억이 깃들어 있다. 특히 정조와 관련이 깊은데, 정조는 월근문을 만들고 매월 정초에 아버지를 모신 사당인 경모궁으로 가서 참배했다. 그리고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편히 모시기 위해 통명전 뒤에 자경전을 지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 춘당지의 여름

창경궁의 수난과 변천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 그 후 창덕궁 등을 복원할 때도 우선순위가 밀려 바로 복원되지 못하다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였는데,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으로 많은 전각이 또 다시 소실되어 1633년에 복원했다. 그리고 1656년(효종7)에 요화당, 난향각, 취요헌, 계월각 등 4동의 전각을 지어 효종의 네 공주를 머물게 했다.

 

그 후 순종 3년(1909) 일제가 창경궁 내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을 갖추어 창경원으로 격하시키고 창경궁 내의원 터에 일본 경찰서까지 들이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식물원으로 꾸미면서 일본 국화인 벚나무를 주종으로 심었는데 해방 후 60, 70년대를 지날 무렵에는 수령이 오래 된 노거수가 되어서 한창때 큰 나무에서 꽃이 무성하게 피어날 무렵이면 상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지금도 그 때 벚꽃놀이를 즐겼던 어른들은 그 시절 풍경을 아련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전각이 헐려 나간 채 너른 공터의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광복 후에도 계속 창경원으로 불리다가 1983년 말에 창경궁이라는 제 이름을 찾고 1986년까지 일제가 파괴 변형시킨 창경궁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는 공사를 진행하여 동물과 식물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동물원 및 놀이 시설을 철거하고 문정전, 빈양문, 명정전 행각 등을 중창 및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처럼 궁궐을 되살리기 위한 일환으로 조경수들을 한국 수종으로 바꾸었고 궁궐의 골격이 되는 정전 일곽의 위엄을 되찾아 현재는 어느 정도 궁궐의 면모가 회복되어 조선시대 역사가 깃든 5대 궁궐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2-71/사적 제123호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