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昌德宮
창덕궁 昌德宮
  • 나무신문
  • 승인 2014.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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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탐방 16 - 한국의 궁궐 2/5

 

▲ 돈화문 진선문 인정전 일우

입지
창덕궁은 종종 경복궁과 비교가 된다. 경복궁은 평지에 천하를 지배하는 군주의 위엄을 의식적으로 펼쳐 보이려 한 모습인데 비해 창덕궁 건물들의 배치는 지형의 흐름과 일치하여 모든 건물들이 지형지세와 알맞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한 자세로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한국 전통 건축의 특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로서 빼어난 우리의 전통 건축은 모두 입지의 특성을 살려 조화롭게 되어 있다.

창덕궁의 주산인 응봉(매봉)은 백악서 흘러나온 지맥의 무게 중심에 해당되는데 북악의 강골적 이미지와 달리 주변에 고루 맑은 기운을 퍼지게 하는 산세로서 창덕궁은 본래 궁궐이 갖는 화려 장대함과 그러한 지형적 형세가 조화를 이룬 빼어난 감각을 갖추고 있다. 궁궐의 위엄과 화려함과 아기자기한 수려함 등 다양한 감각이 어우러져 있다. 창덕궁이 1997년 조선의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이 된 데는 한국 전통 건축 특유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연혁
조선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후 그 지세의 중심에 해당하는 백악산 앞쪽에 정궁인 경복궁을 지어 통치의 기틀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태조 7년(1308)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다음 태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정종이 생모인 왕후의 능묘차 개경에 갔다가 그대로 눌러 앉아 버림으로서 다시 개성이 도읍으로 환도되었다. 그러나 정종은 왕위에 오른지 2년만인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인 태종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태종은 즉위하면서, 바로 태조의 뜻을 받들어 한양으로 재천도를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신료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태종은 집요하게 재천도를 추진하던 끝에 1404년(태종4년) 10월에는 직접 재천도의 후보지의 하나였던 무악을 둘러보러 나섰다. 태종은 종묘에 들어가서 세 읍지(개경, 한양, 무악)의 길흉을 점쳐 정할 것이니, 결정된 뒤에는 이의를 달지 말라고 뒷다짐을 하고 측근 다섯 사람만을 데리고, 종묘에 들어가 동전을 던져 점을 쳤다. 결과는 한양이 좋다고 나왔고 태종은 의논이 정해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러고서는 향교동 동변에 새 궁궐(이궁)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 때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10월19일 새 궁궐이 완공되어 10월25일 창덕궁으로 이름을 지었다. 궁궐이 완공되기 이전인 10월 11일 이미 한양으로 옮겨와 있던 태종은 창덕궁이 완공되자 바로 이곳으로 들어왔다.

1년쯤 지난 1405영(태종5년) 9월 상왕 정종이 한양으로 이어하였고, 그 한 달 뒤 태종도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 때 한양은 도시 기반 시설, 특히 주택이 부족하였으며, 궁궐도 미처 완공되지 않은 상태여서 태종이 연화방에 있는 조준의 집에 임시로 머물 정도였다. 창덕궁은 1405년(태종5년) 10월19일에 완공되었다. 새로운 통치 공간의 완성으로 한양은 조선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되었으며 조선 왕조는 본격적으로 체제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서 법궁 경복궁, 이궁 창덕궁의 법궁-이궁 양궐체재가 마련되었지만 왕들은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다. 정궁인 경복궁이 엄연히 있는데도 새로 이궁을 짓도록 한 태종의 의도는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태종의 정통성의 한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복궁은 태종 자신이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였던 현장이어서 태종으로서 잊고 싶은 과거를 일깨우는 경복궁으로 임어하는 것이 편치 않았을 것이고 아들로서 태조가 건립한 궁궐을 차지하지 않으려는 생각도 했을듯하다.

 

 

▲ 부용지 일우

배치및 구성
창덕궁은 정전인 인정전과 편전인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외전, 침전인 강녕전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세자가 머무는 동궁과 왕의 연침으로 쓰였던 낙선재 그리고 후원이 그것이다. 경복궁이 평지에 가까운 부지에 자리한 때문에 정전·편전·침전으로 이어지는 정연한 축을 가지는 데 비해 창덕궁은 야산을 배경으로 전각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분산 배치되어 있다.

창덕궁은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특히 후원 지역에서 느껴지며 인정전·선정전·대조전 등 궁궐의 중심인 내 외전 영역에서는 그러한 감각이 크지 않다. 단지 인정전 정면의 중심축으로부터 벗어난 돈화문에서  정전을 측면으로 보면서 진입하도록 되어 있는 금천교의 배치, 인정전에서 시작해 선정전, 대조전까지 이어지는 지형적 변화에 따라 터를 닦고 조성한 화계에서 지형 감각을 느낄 수 있다.

 

 

▲ 가을 반도지와 관람정

창덕궁의 모든 건물들은 지형지세에 따라 적절히 놓여 있다. 지형 흐름을 바탕으로 각기 다른 용도와 규모의 시설들을 터의 형국에 알맞게 배치하며 큰 틀을 이루었다. 즉 인정전은 인정전대로의 격식을 갖추기 알맞은 터에 위치해 있고 희정당, 대조전 등도 그 시설이 마치 옷을 입듯이 터의 크기에 맞게 들어서 있다. 창덕궁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건물인 인정전은 주산의 기운이 흘러드는 자리에 반듯하게 자리 잡았고 강녕전등 침전 영역은 인정전 영역으로부터 뒤로 후퇴된 위치에 후면과 좌우 능선에 감싸인 형국을 갖추고 있다. 그로써 정전 영역으로부터 독립적이면서 아늑한 분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선정전 측면을 가다 보면 통로가 점차 좁혀짐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축의 변화는 주변 지형의 흐름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강녕전과 대조전을 감싸는 능선 너머 후원에는 굽이굽이 이어진 능선과 계곡이 어우러진 각각의 장소에 부용지, 반도지, 옥류천 등의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왕이라는 신분이 날 때부터 특별한 존재로 보이고 그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삶이기에 그의 활동에는 항상 의전과 경호상의 문제가 따라다녔기에 혼자 마음대로 쉴 수 있는 편한 공간이 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왕도 모든 국가 대사를 잊고 망중한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궁궐의 일곽에는 부속 정원이 꾸며졌지만 여기처럼 너르고 호젓한 산책길을 갖춘 곳은 없다. 그리고 창덕궁의 후원으로 가는 길은 정치의 격무로부터 벗어나는 홀가분한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후원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그 때의 발걸음은 자연의 품을 찾아드는 홀가분한 여정의 느낌이 든다. 산굽이를 넘으며 자연스레 굽은 길이 느린 발걸음이 되게 하며 주변 정취에 흠뻑 베이게 한다. 그곳은 낮은 산자락과 봉우리들이 잔잔하게 구비를 이루고 있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길로 연못이 이루어져 있다. 한동안 접근을 금기시한 곳이기 때문일까, 후원은 외부 세계 사람들로서는 예기치 않은 원초적 생명력을 갖추고 있다.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