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그 긴 여정을 살아가다
건축, 그 긴 여정을 살아가다
  • 박광윤 기자
  • 승인 2014.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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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모더니스트 ‘김석환 소장’과의 만남

▲ 터울건축 김석환 소장
본지 연재 코너인 <한국전통건축>의 필자로 활약하고 있는 터울건축 김석환 소장은 “근대성의 폐해에 대한 자각이 다양한 사조를 만들고, 또한 기존 사조들을 해체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지만, “집이 가지는 본연성은 변하지 않는다”며 현대건축의 혼란한 경향과 실험성에 대해서 “자기 스타일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사조 자체가 해체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조가 그만큼 견고한 것인지 철학적인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과거 견고했던 논리가 힘이 약해지고, 신념이 모호해지고, 그래서 선뜻 말을 꺼내기 힘든 현상도 있어요. 인류문명사적으로 변천의 현상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최신의 변화를 저도 감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략)”

최종 답변은 그를 좀더 알아보고 듣는 게 좋을 듯하다. 그래서 나머지는 글 말미에서 전한다.

 

▲ 라뚜렛뜨 수도원은 김석환 소장이 가장 좋아하는 르코르뷔제의 작품이다. 고급스런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현대적 조형미를 통해 종교적 경건성을 잘 표현했다. 수도사들이 생활하기에도 매우 적합하도록 모든 공간들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진 드라마틱한 건물이다
심장을 뛰게 한 르코르뷔제
김석환 소장은 어렸을 때부터 건축이 좋았다. 누군가는 자동차 모델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장남감 모형에 열광하듯, 그는 ‘집’에 대한 집착이 남달랐다. 지금이야 국내에도 많은 전통건축물들이 복원되고, 외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현대식 건축물들이 넘쳐나며, 다양한 건축 화보집을 통해 해외 선진 건축물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그가 어렸을 때만해도 기념비적 건축물은 고사하고 건축화보 조차 접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수학여행 단골 장소였던 경주는 우리 선조들의 건축 유산이 차고 넘쳤던 곳. 그는 경주에만 가면 하염없이 옛 건축물들을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건축은 그에게 타고난 기질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마냥 건축이 좋았다고 모두 건축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건축을 전공했다고 모두 똑같은 건축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건축가가 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런데 그에게 누구보다 건축의 열정을 불어 넣은 사람은 바로 ‘르코르뷔제’다.

“어느 날 르코르뷔제 작품집을 사무실 서고에서 보다가 감정이입이 됐어요. 치열한 건축가의 열정, 무엇보다 건축 작품에 대한 교감이 이뤄졌죠. 작가의 길이 생생히 느껴졌습니다. 건축 작업을 한다는 것이 기쁜 일이라는 확신이 섰죠”

작품집이 귀하던 시절, 이 책과의 우연한 만남은 그의 건축 여정을 보다 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르코르뷔제는 “집이란 살기 위한 기계이다”라며 집의 실용성을 강조한 현대건축의 대표적인 건축가다. 고대 건축 양식이 고딕, 바로크 등 스타일적인 양식으로 변천을 해왔다면, 르코르뷔제는 “건축은 외향이 아닌 기능과 목적에 따라 창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치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작곡가들이 음악을 작곡하듯, 건축도 작가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건축가의 감성을 건축에 담아 창작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기계가 정교하게 잘 작동되려면 부속품들이 잘 짜 맞춰져야만 하죠.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을 이루는 난방설비, 창문 등 여러 요소들이 마치 잘 짜 맞춰진 정교한 기계의 부속품들처럼 잘 계획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백화점, 학교 등 건물들은 각각의 역할에 맞는 서로 다른 창작이 필요하며, 인간의 쓰임에 맞게 필요한 공간을 적재적소에 구성하고, 또한 아름답게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 르코르뷔제의 생각이었고, 이러한 그의 사상에 저도 동감하고 있습니다”

 

▲ 남이섬 집필실
▲ 남이섬 집필실
르코르뷔제를 만나다

르코르뷔제에 대한 존경은 건축을 넘어 그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소장은 1992년부터 1996년 사이에 르코르뷔제의 건축적 삶과 좀더 가까이 대면하기 위해 그의 생애기행을 했다. 수많은 작품들을 견학했으며, 르코르뷔제의 무덤을 직접 찾기도 했다.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당연 르코르뷔제의 무덤을 찾았던 일이다. 르코르뷔제는 프랑스 바르세이유 해변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에서 살다 78세에 익사했는데, 그 오두막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덤이 있다. 길가에서 들꽃을 꺽어 묘비 앞에 올려놓으며 마음속 스승을 대면했던 당시의 장면은 김석환 소장의 마음 깊은 곳에 오랫동안 남게 됐다.

이 여행으로 그는 건축에 대한 의욕이 더 커지고 르코르뷔제에 대한 존경과 애정도 더 커졌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가가 죽은 뒤 작품에 대한 더 많은 공감을 얻듯 예술가는 시간의 숙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축도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발전해 나가게 되고, 저도 그렇게 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뭔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휴일이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사실 스무 살 때 르코르뷔제를 보면서 화가로서 역량이 매우 높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난 그림은 그릴 수 없다고 생각했었죠. 그게 제 한계였죠. 하지만 첫 여행 후 혼자서 주말마다 그림 공부를 했어요. 1995년에는 첫 개인 회화전도 열었죠. 그리고 글도 많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르코르뷔제도 평생 많은 글을 썼어요. 글은 건축에 대한 정리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건축에는 르코르뷔제가 그대로 녹아들었다. 그래서 그는 ‘질서’를 매우 중시한다. “변화는 질서가 바탕이 돼야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 소신이다. 마치 동양사상에서 음과 양이 조화하고 이와 기가 결합되는 것처럼 질서와 변화의 조화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나는 건축에 있어서 질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중력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적인 질서이기도 하고 건축 속성 안에 포함된 것이기도 하죠”

르코르뷔제의 작품은 규칙과 질서가 바탕이 돼 있다. 외부는 매우 심플하지만 내부는 매우 복잡하다. 김석환 소장의 작품도 매우 검박한 외향과 달리 변화가 풍부한 내부를 지향한다.

▲ 르코르뷔제 무덤 앞에서
전통건축, 역설을 통한 지혜의 깨달음
‘모더니즘 건축가 김석환’에게 ‘전통건축’은 무슨 의미일까.
‘르코르뷔제에게 다가가는 것’이 그의 건축적 삶인 바와 같이, 그는 철저한 모더니스트다. 시대가 변하듯 시대에 맞는 건축도 변하므로 현대사회에 맞는 새로운 건축을 창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전통건축을 재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쪽이다.

그는 전통건축을 연재하고 책도 썼지만 “내가 지향하는 건축은 전통건축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잘라 말한다. 오히려 전통건축의 한계, 현대건축의 장점을 뚜렷이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전통건축을 통해 ‘역설을 통한 깨달음’을 얻는 것.

“전통건축을 돌아보며 내가 좋아하는 것이 전통건축 자체가 아니라 자연과 잘 맞춰진 결합이라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전통건축을 통해 시선이 넓어진 것이죠. 좋은 건축은 전통건축이건 현대건축이건 공간의 짜임새, 짓게 된 과정에 관계된 사람이나 장인들의 마음가짐이 잘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옥 자체가 사람들의 만족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 강촌의 가을
그는 한국전통건축을 “순치의 건축”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일본의 전통건축은 석가래, 창살 등 벽에 사용되는 부재들이 직선적으로 다듬어져서 가늘다. 마치 목공예품을 만들 듯 다룬다는 것. 하지만 한국전통건축에는 ‘재료를 경제적으로 줄여서 짓게다는 태도가 없다’고 분석한다. 실용적인 철저함보다는 자연의 결과를 덤덤하게 수용해 조화를 추구하는 점에서 우월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고.

“우리 조상들의 집은 자연과 같은 결을 가졌죠. 대표적으로 지붕선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지붕 아래 기둥은 기하하적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지붕은 오히려 그 기하학성을 덮어버리고 자연과 원만한 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전통건축의 독특함입니다”

무엇보다 전통건축의 큰 장점 중 하나는 ‘목재’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통건축의 공간구성은 그 시대에 어울리는 구성일뿐이지만, 전통건축을 이루는 목재의 물성과 구법은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한 매력을 가졌다.

“세계적 트렌드는 재료의 물성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돌이면 돌 나무면 나무 신의 창조물이라고 이야기 하는 모든 사물 재료에는 고유의 가치가 있고, 그러한 재료의 물성이 풍부하게 느끼도록 건축 설계를 하는 경향이 있죠. 이것이 목재의 물성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이 통하는 점입니다”

 

▲ 곤지암 주택
▲ 곤지암 주택
집, 본연성과 그 덤덤함에 대해

“인류문명사적으로 변천의 현상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최신의 변화를 저도 감지하고 있습니다. 너무 많은 개념으로 건축을 바라보고 있어서 혼란해지고 있지만, 너무 관계성에 집착하지 말고 건축 그 자체에 집중하고 싶어요. 인간이 집을 필요로 했고 인간이 그 집안에서 어떻게 느끼고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그 자체에만 집중하려고 해요. 저의 작품집 제목이 『본연성, 덤덤함』 입니다. 원시인이 오두막을 지었을 때 편안하고 감사했던 마음, 그것이 건축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계획을 묻자, ‘항상 간직하고 있는 계획’이 있다고 했다. “하나 하나 작업이 생길 때마다 성의 있게 잘 해야 겠다”는 것, “스스로에게 만족스런 좋은 작품을 해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계획’은 건축가로서의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도 “시대 조류에 흔들리지 않고, 그가 추구해 온 지향에 맞는 최고의 만족도 높은 건축을 만드시길” 진심으로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