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자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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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신문
  • 승인 201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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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전북 군산 경암동과 째보선창

▲ 옛 째보선창 앞. 아스팔트 도로 아래에 바다로 흐르는 또랑이 있었다
째보선창
서해로 흘러들던 물길은 아스팔트 도로에 묻혔다. 도로를 따라 바다로 걷는 길, 바닷가에 째보선창을 알리는 그림과 글이 있다. 그것이 없으면 이곳은 아주 평범한 오래된 항구일 뿐이다.
조선시대 숙종27년에 만들어진 전라우도 군산진 지도를 보면 죽성리(지금의 죽성동)의 서쪽 낮은 산 아래로 흐르는 물길이 째보선창으로 흘러 바다가 된다.

‘째보’라는 이름은 금강의 줄기가 백마강 쪽으로 뻗어가다가 살짝 옆으로 째져서 흐르는 지형적인 모양에서 유래했다. 또 옛날 이곳에 째보(언청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이 이 지역을 주먹으로 장악하면서 이른바 자릿세를 받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늙은 세월이 나뒹구는 바닷가 포구길을 걷는다. 쇳덩이를 자르는 기계음이 허공을 찢는다. 뻘에 박힌 낡은 배는 세월을 먹고 붉은 녹 푸른 이끼를 토해 낸다.

소설가 채만식도 아주 오래 전 째보선창에 앉아 이런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의 작품 ‘탁류’에도 째보선창이 나온다. 째보선창에서 진포해양공원으로 걷는다. 해양공원 옆 빈 터가 넓다.  

 

▲ 옛 군산항까지 이어졌던 철로.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다
수탈의 현장에 피어난 민들레
넓은 빈터는 철길이었다. 기차가 다니던 선로가 붉게 녹슬었다. 누군가 마시던 캔맥주 깡통이 납작하게 눌려 일그러졌다. 담배꽁초 사이로 작은 꽃들이 피어나고 녹슨 철길 옆에 노란 민들레가 피었다.

군산항으로 이어졌던 철길은 일제강점기에 육지의 자원과 곡식을 실어 나르던 수탈의 현장이었다. 1899년 5월1일 군산항은 강압적으로 개항하게 된다. 대한제국은 군산항 일대에 외국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조계지를 설치했는데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종속되기에 이른다.    1906년 군산이사청이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군산에서 일본인들의 독점 권력이 강화되었다. 식민지를 통치하는 권력과 부합한 일본인들은 부를 쌓아갔다.

▲ 일제강점기 군산세관
농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일본인 농장이 늘어나면서 일본인 지주들은 군산농사조합을 통해 대량으로 땅을 사들이거나 간척 사업을 통해 농장을 만들었다.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 되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소작농을 마음대로 이주시켰다.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 노동자로 목숨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 따라 미곡 수탈량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또 일본인들은 쌀 가격을 통제하여 쌀 거래 이익을 극대화하기도 했다. 자유로운 쌀 거래를 금지하고 미곡취인소가 독점적 권리를 갖도록 했다. 시세 차익을 노린 미곡취인소의 거래는 사실 노름이나 다름  없었다. 쌀의 시세가 하루에 17번 변동했는데 일본 오사카의 시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 일제강점기 무역상사 건물. 쌀과 자원 약탈의 본거지였다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일본인들에 비해 한국 사람들은 돈을 잃기 십상이었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부자들도 미곡취인소에서 쌀 거래 시세 차익을 노려 부를 손에 쥐려다 돈을 다 잃고 절치기꾼(미곡취인소로 들어갈 돈이 없어서 밖에서 쌀값이 변하는 시세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하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주인공인 정주사도 절치기꾼이었다.

일제의 강제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은 나라를 빼앗겼다. 대한제국 사람들은 땅을 빼앗기고 자원을 약탈당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목숨까지 빼앗겼다.

지금 그 역사의 현장, 녹슨 철로 옆에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난 것이다. 더 이상 수탈의 기차는 다니지 않지만 그 곳이 황막하다. 그 주변에 군산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옛 세관건물 등이 남아 있다. 그 부근 길모퉁이 어디쯤 미곡취인소가 있었던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 경암동 철길마을 벽
경암동철길마을
경암동철길마을에 도착했다. 진포사거리와 연안사거리를 잇는 도로 뒤편 철길 400m 구간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경암동철길마을이다.

이 철길은 옛 군산역에서 페이퍼코리아 회사까지 원자재 및 제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약 2.5km 철길 중 일부다.

1944년 4월4일 개통 한 뒤로 2008년 6월 말까지 기차가 다녔다. 기찻길이 있던 마을 이름을 따서 경암선이라고 불렀다.

▲ 경암동 철길마을 풍경
▲ 경암동 철길마을 풍경. 햇볕 한 줌도 알뜰하게 쓰고 있다
철길 바로 옆에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골목길로 기차가 다녔다고 생각하면 된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그 풍경은 사라지고 철길만 남았다. 지금도 주민들은 철길 옆에 텃밭을 일구고 빨래를 말린다.

땡볕도 기우는 나른한 오후 경암동철길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 같았다. 철길에 앉아 이 끝에서 저 끝을 바라보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철로 위 허공을 가로지른 빨래줄에 매달린 빨래가 깃발처럼 나부낀다. 언제나 같은 풍경이 반복되는 누군가의 일상 깊이 들어온 여행자의 눈에 그들의 일상이 무슨 상징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속에서 들리는 소리의 공명처럼 귓속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몽롱한 오후가 지나고 있다.

400m 철길을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젊은 연인 두 쌍이 철길 위에 쏟아지는 햇볕처럼 밝게 웃으며 소곤대며 지나갔다. 주민으로 보이는 나이 든 아저씨가 철길에 비스듬히 세워뒀던 짐받이 자전거를 벽으로 바짝 붙여 세우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 본 뒤 철길 끝 소실점으로 사라졌다.

이 끝에서 저 끝 사이 소실점으로 막힌 철길마을 골목 400m는 문 없는 문으로 막힌 공간 같았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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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