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
삼봉 정도전
  • 나무신문
  • 승인 201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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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서울 종로

▲ 경복궁 근정전
조선의 문을 열다
어린 우왕의 통치 시절 고려의 국정은 혼란스러웠다. 굶어 죽고 얼어 죽는 백성이 속출했다. 권문세족의 곳간에는 곡식과 재화가 쌓여가고 권력의 정수리에 앉은 임금은 주어진 통치권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왜구들은 지금의 충남 부여와 공주까지 올라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최영과 최무선 등은 왜구를 토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정몽주는 왜로 잡혀 갔던 고려 사람들을 외교담판으로 구해 돌아왔다. 하지만 고려 최고의 장수 최영 장군도 고려의 최고 석학이자 충절의 상징인 정몽주도 기우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그 가운데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은 늙고 병든 회생불능의 고려를 버리고 젊고 강한 새로운 생명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다.

새로운 나라 조선의 첫 임금은 이성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가 함께 새 나라를 만들자는 뜻을 전한다. 당시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성계-글쓴이가 삽입)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軍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詩)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그루의 소나무 / 몇 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는지 /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정도전이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냐고 말한 것은 왜구의 토벌이 아니라 조선의 건국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뜻을 이루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더불어 새 나라의 문을 열었다. 왕권과 신권의 견제와 조화로 운영되는 국가 체제를 갖추고 굶어죽는 백성이 없는 민본정치를 펼칠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정도전은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조선경국전 등을 만들었다. 지금 서울성곽이라고 부르는 한양도성의 경계를 확정짓고 성곽을 쌓았다. 경복궁을 건설하는 등 새로운 수도 건설의 책임을 정도전이 맡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도전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은 열렸다. 하지만 그는 그가 만든 새 나라가 제대로 된 기틀 속에서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암살당한다.

 

▲ 낙산에서 흥인지문 방향으로 뻗어내린 한양도성 성곽
암살, 숨막혔던 그 하루 이야기
재상의 정치, 신권이 왕권을 견제하고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루며 국가를 경영하는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었다.

왕의 길로 들어서는 첫 단계는 세자 자리에 오르는 것인데, 이방원은 세자가 되지 못했다. 정도전의 세력들은 이방석을 세자의 자리에 앉혔다. 조선 개국의 공이 큰 이방원은 그러한 상황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당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던 반면 이방원은 일개 왕자에 불과 했다. 하지만 조선 개국의 대업을 함께 했던 이방원의 기개를 알고 있던 정도전은 이방원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정도전은 왕자들의 사병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치적 수순대로 왕자의 사병은 그의 뜻대로 해체됐다. 그리고 다음 한 수는 이방원 등 왕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이방원의 귀까지 흘러들어가게 됐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자신의 계획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운명의 날은 밝았다. 정도전은 임금의 병환을 빌미로 왕자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일시에 제거하려 했다. 

▲ 인왕산에서 바라본 한양도성 성곽. 멀리 남산이 보인다
1398년 8월 어느 날 저녁 7시~9시 쯤, 왕이 있는 곳에서 어떤 사람이 나와서 임금의 병이 위급하니 왕자들만 안으로 들게 했다.

이때 이방원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궁궐에서는 밤이 되면 모든 문에 등불을 밝히도록 했는데 이날은 등불이 하나도 없었다. 순간 이방원은 바로 이 자리가 정도전이 마련한 덫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방원은 배가 아프다며 서쪽 행랑 문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방원의 뒷모습을 본 익안군과 회안군도 함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은 그길로 궁궐을 빠져 나와 이숙번이 기다리고 있던 장소로 달려갔다.

사실 이방원은 궁궐로 들어가기 전에 이숙번으로 하여금 무장을 하고 신극례의 집에 머물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대궐로 들어간 것이다. 이방원은 또 종 소근에게 궁궐 서쪽 행랑 뒤에서 말을 대기하고 있으라고 시켰던 것이다. 이날부터 10여 일 전 왕자들의 사병을 없애고 무기를 모두 불태울 때 이방원의 부인은 몰래 무기를 빼돌려 숨겨 놓았다.
이렇게 해서 군사와 무기를 확보하게 된 이방원은 정도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고 시켰던 수하의 첩보를 듣고 정도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당시 정도전은 뜻을 나눈 동지인 남은 등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남은 첩의 집에 모여 있었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있는 집을 포위하고 그 옆집에 불을 질렀다. 불이 난 것을 안 정도전 등은 밖으로 뛰쳐나왔다.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이방원은 그 자리에서 죽였다. 정도전은 옆집으로 피했으나 결국 잡혀 이방원과 대면하게 됐다. 그리고 이방원은 정도전의 목을 베게했다.

 

▲ 종로구청 옆에 있는 정도전 집터 표지석
정도전이 살았던 집
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문을 연 개국공신 정도전은 이 일로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역사에 부각되지 못했다. 조선 후기 정조는 정도전을 흠모해서 삼봉집을 간행했다.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고종은 조선을 세우고 한양도성을 건설하고 경복궁을 세운 정도전의 공을 인정하고 정도전에게 문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수백 년 동안 묻혀있던 정도전은 조선이 망할 무렵에 와서야 복권되었던 것이다.

정도전이 살았던 집터는 현재 종로구청 자리다. 종로구청 민원실이 있는 건물 한쪽 옆에 정도전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에 따르면 정도전 집터에 나중에 사복시와 제용감 건물이 들어섰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수송국민학교가 있었다. 

현재 종로구청 본관 건물이 옛 수송초등학교 건물이다. 지금 그 건물 1층에 ‘삼봉서랑’이라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또 구청 뒤 ‘The-K 트윈타워’ 앞에 제용감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 걸로 봐서  최소한 그곳까지 정도전 집터였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정도전의 집터는 엄청나게 넓었다.   

▲ 종로구청 본관 건물. 옛 수송국민학교 건물이다
▲ 종로구청 본관 건물에 삼봉서랑이라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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