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백당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23호
서백당 書百堂 중요민속자료 23호
  • 나무신문
  • 승인 2014.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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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김석환의 한국전통건축 탐방 3 - 한국의 名家 3/14

 

▲ 사랑채와 사당

 

양동마을의 역사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위치한 양동마을은 산업사회 이후 우리 전통마을의 모습이 급속히 사라져온 상황에서 격조 높은 역사문화의 체취를 오백년 넘게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진정한’ 전통마을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 우리나라의 대표적 반촌(班村) 마을로서 그 가치가 인정돼 2010년 7월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위원회는 선정 이유로 “생산영역, 생활영역, 의식영역으로 구성되는 한국 씨족마을의 전통적인 공간 구성을 기능적이고 경관적으로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매우 드문 사례이고, 조선시대의 가장 시기가 이르고 뛰어난 살림집, 정사, 정자 등의 건축물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며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고문헌과 예술 작품을 보관하고, 전통적인 가정의례와 특징적인 마을 행사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는 훌륭한 사례”임을 들었다.

 

이 마을의 입향조는 조선 초기 이곳에 들어와 정착한 손소(1433~1484)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훨씬 위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수 있는데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마을의 안산인 성주산 정상 구릉지에 청동기 시대 묘제의 하나인 석관묘가 100여 기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기원전(BC 4C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웃 마을인 안계리에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미 삼국시대인 4~5세기경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 급에 속하는 유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고려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는 오씨(吳氏), 아산 장씨(牙山 蔣氏)가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확인할만한 자료는 없다.

손소 입향 후에는 이번이 손소의 장녀와 결혼해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단 집성촌을 이루게 돼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양동마을이 형성됐다.

 

 

▲ 사랑채 일우

 

대표적 전통마을의 입향조 가옥서백당은 월성 손씨 4대손인 손사성의 차자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가 이 마을에 정착할 때 지은 집이다. 손소는 처음 풍덕유씨 만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부락에 입향해 성종 15년(1454년)에 현재의 월성(月城) 손씨(孫氏) 종가인 서백당을 신축했다고 전해진다. 원래 양동리는 풍덕류씨가 살던 곳이었는데 월성 손씨 4대손인 손소가 25세 때 류씨 집안의 복하란 분의 딸과 결혼한 것이 인연이 돼 이 부락에 터를 잡고 뿌리를 내리게 됐다. 손소는 처음 풍덕유씨 만호 유복하의 상속자로 이 부락에 입향했으나 현재는 풍덕유씨의 후손이 한사람도 살지 않으므로 월성 손씨 문중에서 외손봉사를 하고 있다.

 

양동마을은 마을의 뒷 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 줄기로 갈라진 능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 지세를 이루고 있다. 서백당은 그 주산의 기세가 직접 연결돼 풍수지리상으로 빼어난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데, 풍수가가 이 터를 잡아 주면서 장차 3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으로 예언했고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서백당(書白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다.

 

 

▲ 사당

 

양반가옥의 원형서백당은 조선사회에서 새로운 유형의 ‘양반가옥’이 형성돼가는 원형적 모습을 띠고 있다. 양반가옥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조상의 제사를 중시하고 남녀 유별시하는 유교사상과 주인과 하인 간의 계층적 신분 사회를 이루고 있던 사회적 환경에 적합한 가옥 구조를 이루려 한 가운데 하나의 정형으로 자리 잡게 됐다.

 

안채와 사랑채는 ‘남녀칠세부동석’ 등의 관념에 입각해 남녀 간의 생활공간을 달리 설정한 결과이며 행랑채는 하인들의 생활 영역으로 신분간의 상하관계가 적용돼 있다. 그리고 조상을 모시는 사당은 비록 구모는 크지 않지만 가옥 내에서 가장 높은 위계를 부여해 높은 지형에 독립적으로 위치하도록 했다.

즉 그러한 가옥구성은 조선시대 국시로 대두된 성리학적 이념에 적합한 생활방식에 맞게 가옥을 형성하려 한 것인데 가옥 본래의 살림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남녀 공간을 구분해 사랑채를 독립적으로 갖추게 되면서 독특한 가옥구조를 갖게 됐다. 그처럼 가옥 내 사랑채 영역을 별도로 둔 것은 남성에 대한 특권처럼 인식될 수 있지만 그것은 여자에 대한 배려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서백당은 그렇게 생성된 양반 가옥의 원형적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주거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안채 입구

 

격조 있는 치목 솜씨와 기품서백당은 하나의 가옥으로서 전체적인 질서 틀을 잘 갖추고 있는데 가옥의 중심이 되는 안채는 가로 세로의 길이가 거의 같은 정형의 ㅁ자형 평면의 바탕에서 매우 다양한 성격의 공간들이 짜임새 있게 조합돼 있다. 정면 중앙의 중문간을 통해 들어선 안마당은 가로 세로가 각각 3칸의 크기인데 전통건축에서 마당은 작업, 의례 등 생활공간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방들의 연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에 면한 실들의 채광과 환기 등 쾌적성을 갖게 하고 열린 구조로 된 대청에서의 개방감을 크게 하며 대청 후면 창을 통해 들어온 산바람이 순환되게 하기도 한다. 특히 이곳처럼 건물에 의해 완벽하게 위요된 마당은 건축과 하나로 결합돼 독자적인 영역성을 갖게 되며 완결된 구조를 형성한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사랑채는 주거의 원형적 바탕에 그 시대 가옥의 사회적 요구가 반영된 모습이고 서백당은 그러한 가옥 구조의 초기 양상을 띠고 있다. 당시 사회에서 남자들의 사회적 활동은 대개 방문해 대화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양반 가옥에서는 더러 많은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 때 안주인이 외간 손님과 마주 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이고 그러한 부담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예 남자의 공간을 따로 두는 것이 더 편리했을 것이다.

서백당의 안채 구성을 보면 좌측과 후면 ㄱ자 부분에 부엌, 안방, 대청, 산실청의 고유의 살림 기능을 갖추고 있고 정면과 우측 모서리 부분에 사랑채 공간을 바깥마당에 면하도록 설치해 놓았는데, 그처럼 한 몸채에서 안채와 사랑채가 완벽하게 독립된 생활 영역으로서 성격을 갖게 한 솜씨와 안목이 놀랍게 여겨진다. 그리고 지형에 따른 기단의 레벨의 차이를 활용해 건물 하부와 다락 등의 공간들을 면밀한 계획에 의해 형성하는 점도 지혜롭게 여겨진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은 사랑채의 형성뿐 아니라 사당의 의미가 중시됐다. 사당은 사대(四大)까지 선대의 위폐를 모시고 기일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이다. 당시 풍습은 조상을 섬기는 것이 후손이 복되는 길이라고 믿었으니 지극 정성 제사를 지내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특히 불천위를 모신 사당은 그 중요성이 더욱더 커지게 됐다. 어느 가문에서 불천위를 배출하는 것은 조선사회에서 가문의 최고 영예로 여겨졌다. 서백당의 단출하면서도 단아한 사당은 그 집안의 반듯함과 종가의 격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 안채 전경

 

 

김석환  한재 터·울건축 대표. 1994년부터 터·울건축을 개설하여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삼육대, 광주대 건축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1999년 건축문화의 해 초대작가 및 대한민국 건축대전, 대한민국 건축제 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일산신도시 K씨주택, 목마도서관 등이 있고, 저서로 <한국전통건축의 좋은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