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중
봄 마중
  • 나무신문
  • 승인 2014.03.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제주 함덕서우봉해변

▲ 함덕서우봉해변 산책로 풍경 ⓒ장태동
봄 마중 참 요란하게 하고 왔다. 비에 흠뻑 젖은 부산의 바닷가 오솔길에도 바람 부는 제주의 밤 공기에도 화창하게 갠 하늘 아래 옥빛으로 빛나는 파도 위에도 봄은 살짝 다리를 얹었다. 어쩌면 봄이 먼저 와서 나를 마중했는  지도 모르겠다. 

 

이별 없는 이별
흙으로 떨어진 빗방울이 대지에 떨어져 숨구멍을 틔운다. 언 땅 아래 고여 있던 흙의 향기가 대지의 숨구멍으로 샘솟는다.

비 오는 부산 절영해안 산책로를 걸었다. 포장된 널찍한 길을 벗어나 바닷가 돌길, 계단 길로 접어든다. 산책로라고 하기 보다는 바닷가 절벽을 오르내리는 길이라고 하는 게 옳겠다. 가지 못할 곳에는 어김없이 계단을 놓았다. 간혹 절벽 높은 곳에 만든 전망대에서 한참 동안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다.

전체 10km 정도 되는 코스 가운데 푸른 바다와 애틋한 사연을 품고 있는 항구, 보기 좋은 해안절벽, 바닷가 산기슭에 붙어사는 달동네 등 부산을 부산답게 만드는 풍경과 사연을 간직한 약 5km 구간을 잘라 그곳만 걸었다.

그곳에는 영화 ‘변호인’을 찍은 바닷가 산기슭 마을도 있었고, 산사태로 무너진 흙이 해변을 덮은 현장도 있었고, IMF시절 실직의 아픔을 딛고 이 바닷가에 길을 낸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도 있었다.

1회용 우비는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비가 옷에 스며 살갗을 타고 흐른다. 다 젖었으나 마음은 화창했다. 제주로 가는 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비 내리는 공항은 또 다른 색깔의 이별가다. 비 내리는 공항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보지도 않은 나라의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느 여인과의 사랑을 꿈꾸다 들켜버린 밑도끝도 없는 망상 이별의 그윽한 슬로우모션. 이별 없는 이별이 서글펐다.

부산을 떠나가는 밤 비행기를 겨울이 배웅했다. 도착하는 제주에는 봄이 나를 마중하고 있었다. 

 

▲ 함덕서우봉해변 산책로에 있는 조형물 ⓒ장태동
돼지꼬치와 쿠바의 바다
제주는 비가 끝물이다. 흐느적거리는 이국적인 나무가 반기는 공항을 뒤로하고 늦은 저녁을 먹으러 곧바로 식당을 찾았다. 한꺼번에 2~3백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대형 식당이다. 대략 이런 곳에서 맛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맛 보다는 허기에 기대기로 했다.

주 메뉴는 갈치조림이지만 반찬으로 나온 돼지고기 꼬치가 눈에 들어온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음식이다. 비계, 살코기, 털이 숭숭 박힌 껍질, 다시 비계, 살코기를 사각 막대 모양으로 잘라 순차적으로 꼬치에 꽂았다. 이것을 맬젓에 찍어 먹는다. 맬젓이 오래 숙성된 강한 맛이 난다.

제주도 소주 한라산을 시켰다. 찬 소주가 들어간 뱃속이 알싸하다. 후끈한 기운이 솟구치더니 몸이 더워진다. 소주 한 잔 더 털어 넣고 꼬치 하나 더 빼 먹고, 맛은 없으나 색다른 맛이니 한 번 쯤 먹어볼 만 했다.

숙소는 함덕해변 바닷가에 있었다. 창문 앞이 바로 바다다. 5층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밤바다가 신선했다.

간혹 오가는 자동차의 불빛이 꼬리를 남기고 멀리 사라질 때까지 컴컴한 바다 어슴푸레한 길을 한 눈에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 별은 빛나지 않았지만 먼 바다부터 눈 아래 바다까지 어둠은 그라데이션으로 빛나고 있었다. 

쿠바의 어느 바다가 떠올랐다. 바닷가 방파제 앞에서 작은 타악기를 두드리며 파도 보다 경쾌한 리듬을 타던 사람들, 쿠바의 그 바닷가 길거리가 이 밤에 떠오른 건 순전히 함덕해변 밤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저 가만히 이렇게만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함께 온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해변 길거리로 나섰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 갔으나 춥지 않고 상쾌했다. 길거리 악사가 봉고를 두드리며 이 거리 어디쯤에서 바람 같이 춤추고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는 바람 같이 걸어서 바닷가 생맥주 집으로 들어갔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쪽에 앉아 파도 같은 생맥주를 밤이 깊도록 들이켰다.

 

▲ 서우봉을 넘어 도착한 북촌 ⓒ장태동
함덕서우봉해변 산책
약간의 숙취를 콩나물북어국으로 날려버린 아침은 상쾌했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얼굴을 내민다. 옥빛 바다 곳곳에 햇볕이 떨어지는 걸 보면 맑은 하늘은 시간문제다.

‘느끼어 움직인다’는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감동’ 아니겠는가? 함덕의 바다 앞에선 사람들의 입에서 ‘와’ 소리가 나온다. 젊은이들은 팔팔 뛰며 깔깔 댄다. 어떤 이는 무리를 떠나 스스로 홀로 되어 바다 앞에 선다. 연세 많으신 분은 바닷가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본다. 감동은 하나이되 표현하는 방식은 다 다르다. 나는 감동받은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감동을 표현하고 있었다.

드디어 백사장이 반짝인다. 파도로 일어서는 바다에 햇볕이 투과되면서 맑은 옥빛 물마루를 만든다. 갈매기가 자맥질하듯 파도를 스치고 날며 차고 오른다. 그런 바닷가 길을 따라 걷는다.

길은 바닷가 오름 서우봉으로 이어진다. 바다가 보이는 서우봉 양지바른 곳에 유채꽃이 피었다. 젊은 커플이 유채꽃길을 걸어 언덕을 너머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길에 핀 꽃도 그 길을 걷는 그들도 모두 꽃이다.

흐르는 땀을 바람에 말리고 햇볕을 즐기며 걷다보니 북촌마을이 나왔다. 돌담과 지붕 낮은 집들, 파릇한 들판에 봄은 먼저 와서 나를 마중하고 있었다.

▲ 돼지고기 꼬치 안주 ⓒ장태동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Tag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