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다
쪽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다
  • 나무신문
  • 승인 201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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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전남 나주 쪽염색

▲ 정관채 선생과 부인이 쪽물들인 천을 널고 있다 ⓒ장태동
나주에 가면 하늘색 보다 더 파란 쪽빛으로 세상을 물들이는 사람이 있다. 쪽물 들이는 사람,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씨는 쪽염색에 인생을 걸고 쪽빛 문화를 일구고 있다.

 

윤회매 쪽빛 꽃잎
그윽한 쪽빛 천 위에 도자기가 놓였다. 도자기를 밀랍으로 채웠다. 실제 매화나무가지에 밀랍을 입히고 도자기에 꽂았다. 꽃 수술은 노루털이고 꽃가루는 금가루다. 꽃잎은 쪽물 들인 천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꽃 색이 쪽빛이다. 꽃 색의 이름을 따서 청매화라고 하지만 그 작품 전체를 두고 윤회매라고 한다.

조화지만 실제 벌이 날아와 앉는다. 벌들이 밀랍에서 꿀을 따서 벌집을 짓고 꿀을 모아두면 다시 꿀을 짜내고 밀랍이 생긴다. 돌고 도는 한 생이라서 이름이 윤회매다.

▲ 정관채 선생이 쪽물들인 천을 널고 있다 ⓒ장태동
윤회매는 쪽물 들이는 사람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씨가 지내는 전남 나주 다시면 쪽염색 전수관에 있다. 윤회매는 그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윤회매의 쪽빛 꽃잎에 들어간 쪽물을 그가 냈다. 청매화라는 이름을 얻게 한 쪽물, 정관채 씨는 쪽염색의 대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나주 다시면 샛골이다. 예로부터 샛골에서 목화를 많이 재배했다. 샛골나이란 무명천을 짜는 것을 말한다. 영산강 강변에는 쪽풀이 많았다. 영산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예부터 벼 대체작물로 쪽풀을 심었다. 영산강 하류는 바다와 가까워 쪽염료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매염제 소석회를 만드는 재료인 굴이나 고막 껍질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소석회는 굴이나 고막껍질을 가마에서 1000℃ 이상으로 구워 만든다.

▲ 윤회매. 쪽물들인 천으로 꽃잎을 만들었다 ⓒ장태동
쪽염색이 발달할 수 있는 여러 조건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영산강변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와 근대말까지 전통적 방법으로 쪽염료를 많이 만들었다. 1950년대까지 샛골을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쪽염료를 생산했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선생 ⓒ장태동
아름다운 인생 
6·25 한국전쟁 이후 쪽염색은 사라졌다. 1970년도 중반부터 전통 쪽물 재현을 시작으로 1980년 이후 다시 쪽염색이 점차 보급되고 있다. 그 중심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씨가 있는 것이다.

쪽염료를 만들고 쪽염색을 하는 일은 고된 노동의 연속이다. 쪽풀은 봄에 씨를 뿌려 7~8월에 수확한다. 쪽물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복잡하다. 쪽풀을 물에 우리고 매염제인 소석회를 넣는다. 소석회는 굴 껍질이나 고막껍질 등을 1000도가 넘는 불에 구워 만든다. 색소가 되는 성분을 침전시키고 불용성 침전물에 잿물을 섞어 환원형으로 만들어 수용성 재료를 완성한 뒤 천에 물을 들인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물들인 천을 또 물에 넣어 꺼낸 뒤 공기 중에서 말린다. 염색이 끝난 천을 또 물에 씻는다. 잿물을 빼지 않으면 쉽게 탈색되기 때문에 잿물을 빼야한다. 삶고 말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잿물을 다 뺐으면 중성세제로 세탁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 염색장 정관채 씨가 태어나기 전부터 샛골 등 나주 일대에서 이런 일들을 해왔던 것이다. 태어난 자연환경과 그 환경에 기대어 살았던 생활이 그를 쪽염색의 길로 자연스럽게 인도한 것이다.

젊은 시절 미술을 전공하면서 쪽염색에 인생을 걸었다. 6·25 한국전쟁 이후 끊어진 쪽염색의 맥을 이은 것이다. 손톱에 쪽물 빠질 날 없었던 그는 2001년 9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는 다시평야 한쪽에 있는 전수관은 쪽염색을 전문적으로 배우려는 사람들과 쪽염색체험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열린공간이다. 

 

▲ 나주 하얀집 곰탕 ⓒ장태동
맑아서 깊은 맛 나주곰탕
쪽 염색에 시장기가 돈다면 나주시내로 나가서 100년도 더 된 역사를 품고 있는 나주곰탕을 먹는다.

나주 시내에는 하얀집 노안집 남평할매집 등 곰탕으로 유명한 식당 예닐곱집이 거리를 이루고 있다.

하얀집은 100년이 넘게 가마솥에서 곰탕을 끓이고 있다. 나주 5일장이 설 때만 곰탕을 팔았다. 처음에는 곰탕이 아니라 그냥 국밥이었다. 멍석 깔고 무명천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임시 식당을 차린 거다. 그러다가 육문식당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50년대 들어 국밥에 곰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하얀집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노안집은 삼대에 걸쳐 곰탕을 팔고 있으며 남평할매집도 60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세 집 곰탕 맛이 비슷한 데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단골집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나주곰탕은 무릎뼈와 양지 사태 갈비 등심 안심 등 고기를 넣어 끓인 맑은 국물로 유명하다. 국물이 맑으면서도 깊은 맛이 난다.

나주 곰탕을 먹고 고려초기부터 조선말기까지 1000년 동안 전라도의 중심 도시였던 나주의 흔적을 찾아 나주읍성 이곳저곳을 산책하는 것도 좋다.  

 

▲ 나주읍성 동문 ⓒ장태동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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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