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게 가는 길
왕에게 가는 길
  • 나무신문
  • 승인 201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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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여행과 상념 - 경북 경주 일대

▲ 문무대왕릉 ⓒ 장태동
동산 같은 고분이 도처에 솟아 있는 경주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다. 고분에 얽힌 옛 이야기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하다.  

 

신라의 궁궐이 있었던 월성
경주국립박물관 정문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종이 보인다. 신라 33대 성덕대왕이 죽자 아들인 경덕왕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에 구리 12만 근(72톤)으로 큰 종을 만들려고 했는데 경덕왕 당대에 완성하지 못하자 그의 아들인 혜공왕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종을 완성했으니 그 종의 이름이 성덕대왕신종이다. 완성된 종은 19톤으로 원래는 성덕대왕 원찰인 봉덕사에 있다가 영묘사, 경주읍성 남문 밖, 동부동 옛 국립박물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박물관 정문을 나와 길을 건너면 월성이다. 월성은 신라 5대 파사왕 때 축성한 왕궁인데 지금은 소나무숲과 잔디밭만 남았다. 월성은 이름 그대로 초승달 모양의 지형으로 남쪽에는 남천이 흐르고 동, 서, 북쪽 방향에는 해자를 만들어 적의 침략에 대비했다. 해자로 쓰였던 연못은 지금은 다 메워지고 없지만 남천은 아직도 월성의 남쪽에 흐르고 있다. 아름다운 소나무숲을 산책하는 도중에 조선시대에 만든 석빙고를 만난다. 월성 산책로는 계림으로 이어진다.

▲ 월성은 멋진 소나무가 많다 ⓒ 장태동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 설화와 관련있는 곳이다. 신라 탈해왕 때 호공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가보니 금궤가 있어서 왕에게 아뢰니 왕이 직접 그 곳에 가서 금궤를 내려 덮개를 여니 사내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성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고 했다. 금궤가 있던 숲은 원래 시림이라고 했었는데 그 이후 계림으로 부르게 됐다. 계림 안에 있는 비는 1803년(순조 3년)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있다.

계림에서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첨성대를 지나 대릉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대릉원은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고분군이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이 유명하다. 천마총은 신라 22대 지증왕의 능이라고 추정한다. 지증왕 대에 이르러 신라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했다. 나라 이름을 신라라고 한 이유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삼국사기 지증왕 편에 ‘덕업일신 망라사방’이라는 말이 있다.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의 신(新)과 그 뜻이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의 라(羅)가 합쳐져 ‘신라’가 탄생한다.

대릉원은 일출지로도 유명하다. 일출은 바다나 산꼭대기에서 보는 게 보통인데 대릉원 고분과 고분 사이로 떠오르는 해는 바다와 산의 일출과 또 다른 분위기다.

▲ 성덕대왕신종 ⓒ 장태동
아버지와 딸 죽어서도 마주보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원화로를 따라 남쪽 방향으로 약 1.4km 정도 가다보면 선덕여왕릉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초초의 여왕이었다.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창건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했다. 황룡사 9층 목탑 공사의 총 감독은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인 김용수가 맡았고 탑은 백제  사람 아비지가 만들었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죽을 자리를 신하들에게 알려준 일화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은 자신이 모월모시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 지내도록 하라고 했는데 신하들이 그곳이 어딘지 몰라 다시 물으니 낭산 남쪽이라고 말했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진짜로 세상을 떠났고 신하들은 왕이 예견한 대로 그 자리에 장사 지냈다’는 내용이 전한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도리천은 그곳에 없었다. 그리고 훗날 문무왕이 선덕여왕 능 아래 사천왕사를 지었는데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때서야 선덕여왕의 신령함이 더 위대하게 보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선덕여왕 능에서 직선거리로 약 1km 거리에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의 능이 있다. 남촌 들녘을 사이에 두고 대를 이어 왕을 지낸 아버지와 딸이 죽어서도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선덕여왕릉 ⓒ 장태동

삼국 통일의 주역들이 묻힌 곳
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1.4km 거리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김유신장군의 묘가 있고 그곳에서 약 3km 거리에 김유신 장군과 처남 매부 사이였던 태종무열왕(김춘추)의 능이 있다. 김춘추의 능은 신라의 능 가운데 주인이 정확하게 알려진 몇 개 안 되는 능 가운데 하나다. 능 앞에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는데 비석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았는데 머릿돌 중앙에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남아 있다. 태종무열왕릉 위에는 이름 모를 고분이 있는데 이를 두고 서악리고분군이라고 한다. 태종무열왕릉 옆 선도동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삼층석탑이 나오고 그 뒤편 선도산 자락에 신라 24대 진흥왕릉(추정)과 그의 아들 진지왕릉(추정) 등 여러 기의 고분이 자리잡고 있다. 진지왕의 조카가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이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바다에는 신라 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이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죽어서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겠다며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동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아들인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화장해서 지금의 수중릉에 뿌렸다. 당시 신문왕은 화장한 아버지의 뼈가루를 품고 모차골을 지나 산을 넘어 기림사를 거쳐 지금의 봉길리 해변에 도착했다.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바다에 있는 약 20미터 길이의 바위섬이 수중릉이다. 바위섬 가운데는 조그만 수중 못이 있고 그곳에 길이 3.6미터 너비 2.9미터 두께 0.9미터의 화강암이 놓여 있다. 신문왕 재위 2년에 아버지의 능이 있는 바닷가에서 가까운 곳에 감은사를 건립한다. 그리고 감은사 금당 밑에 특이한 구조의 공간을 만들었다. 호국룡이 된 아버지가 감은사 금당까지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 그런 공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문무대왕릉과 봉길리 해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이견대다. 

▲ 동궐과 월지. 옛날에는 안압지로 불렀다 ⓒ 장태동

장태동 
공식 직함은 기자.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여행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그 동안 온세통신, LG정유 사보에 여행 에세이를 기고했고 ‘한겨레리빙’, ‘굿데이365’ 등에 여행칼럼을 냈다. 저서로는 <서울문학기행>, <Just go 서울 경기>, <맛 골목 기행>, <명품올레 4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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